자비관 공부3:
●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정의이며 선인가.
[ 요약 ] ○ 자비관에 대한 반대입장 |
자비관을 마치고 다음 인연관과 계분별관을 살펴야 하는데,
앞에서 말한 자비관의 수행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공감을 쉽게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다.
★ 즉 누군가 악행을 하면 그에 대해 함께 분노를 일으키고
악행을 한 이에 대해서는 그가 행한 악 만큼 그에게 다시 상응한 고통과 불쾌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것이 윤리와 정의 또는 선의 원리라는 반대 의견이 있다.
최근에, 학생폭행문제에 대해 토론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그런 의견이 주류인 것 같다.
그러나 학생 폭행문제를 포함해 모든 사회문제에는 이와 똑같은 문제가 들어 있다.
☆ 즉 누군가 악행을 하고, 다시 상대가 이에 분노하여 악으로 보복 응징하는 관계에는
부정관과 자비관의 수행방안의 내용이 모두 관련된다.
그래서 인연관과 계분별관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이를 조금 더 살피고자 한다.
[ 요약 ] ○ 불교의 입장 1 |
○ 우선 처음 악행을 행하는 이를 보자.
그는 처음 무언가 탐욕에 이끌렸거나, 또는 분노를 일으키기에 어떤 악행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가장 첫 문제다.
그는 탐욕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탐욕을 극복해야 하고,
또는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앞의 부정관과 자비관의 수행의 목표다.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처음 악을 행하게 되는 이에게 이런 내용을 강조하게 된다.
[ 요약 ] ○ 불교의 입장 2 |
○ 앞에서 본 것처럼 각기 탐욕과 분노를 부정관과 자비관을 통해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처음 이 첫단계에서 탐욕과 분노를 극복하는 데 실패한다.
그래서 그런 어떤 이가 처음 악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경우 누구나 처음 그런 악행을 시작한 이가 잘못임을 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이들이 그런 악행을 행한 이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 악행을 시작한 이에게 상응한 고통과 불쾌를 주어야 한다고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바로 이 부분의 다른 이들도 앞의 첫 악행자와 똑같은 구조에 빠져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두번째 단계에서 악행을 가하려는 이는
그 가해나 보복의 이유로 처음 첫번째로 악행을 행한 이의 악행을 이유로 들게 된다.
그리고 악에 악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정의이고 선이며,
악은 악으로써만 누르고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이 역시 상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애착하는 것을 집착해 지키려 하고,
또 무언가 상대의 악행에 불쾌를 느끼고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처음 악행자가 탐욕을 갖거나 분노을 일으켜 악을 행하게 되는 면과 그 실질 내용이 같은 것이다.
즉 최초에 악행을 행한 이가 그 나름으로
무언가에 탐욕 또는 분노를 갖고 악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를 상대하는 다른 이들도 역시 탐욕과 분노를 갖고
악에 악으로 상대하여 나온다.
결국 처음 악행을 행한 이나
그 악행으로 불쾌와 고통을 받고 분노를 일으켜
그것을 가져다 준 상대에게 악으로 되갚아 보복을 하려는 이나,
서로 탐욕에 집착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면이 사실은 같다.
물론 첫번째 처음 악행을 한 이가 탐욕이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것에 큰 잘못이 있다.
그래서 처음 단계에 그런 상황에 처한 이가
먼저 탐욕을 극복하고 분노를 자비로 극복하여 벗어 나오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첫번째 악행을 상대하는 두번째 다른 이들 역시 또한 그 실질 내용이 같다.
그래서 다시 이 두번째 단계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누구나 이 두번째 면을 행하게 되기 쉽다.
즉 누군가 악행을 저지르면 누구나 이에 대해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켜 악행으로 보복하려 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이 단계에서의 자비관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 결국 상대가 악을 행한다고 자신도 똑같이 그를 상대하여 악행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가 분노가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에게 악으로 해를 가하려 하지 않아야 한다.
[ 요약 ] ○ 불교의 입장 3 |
만일 앞의 두번째 단계에서 어떤이가 자비관을 통해 분노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면,
또 그 이후 다른 세번째 단계의 다른 이가 문제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처음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 다른 이에게 폭행을 행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폭행을 당한 이나 그 가족이 분노하여 후일 그 가해자를 찾아가 몽둥이로 가격한다.
어떤 폭력학생이 친구를 폭행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친구의 아버지가 그 폭력학생을 찾아가 다시 폭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 이후 다시 그 폭력학생이나 그 폭력학생의 아버지 또는 가족 형제가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
그 이후 이런 관계는 무한히 반복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매단계 단계마다 같은 원리가 적용됨을 볼 수 있다.
○ 그래서 만일 첫번째 이가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자(慈)와 비(悲)의 마음으로 그것을 극복해 벗어나와야 했다면,
다시 두번째 단계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 누군가가 악행을 저지를 때,
이를 상대하는 이들도 역시,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고
자와 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 또 이 두번째 단계가 실패하여 누군가 상대에게 악으로 보복한다면,
다시 세번째 단계로, 이런 보복에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또 다른 이들도
또한 앞과 마찬가지로 자와 비의 마음으로 그 분노를 극복해야 한다.
○ 그런데 이것이 사실 첫 단계부터 그 이후 매 단계 단계마다 대부분 실패한다.
때문에 하나의 악행은 그 뒤에 계속 꼬리를 이어 또 다른 분노와 악행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한번 누군가 분노를 일으키면 그 분노는 계속 여기저기로 확산되어 나간다.
그래서 모든 비극의 사태를 파헤치다보면, 똑같은 모습을 반복해 보게 된다.
하나하나 비극의 현장을 살펴보면
가해자는 과거에 무언가 억울한 피해자였고,
또 피해자는 또 과거에 남에게 무언가 억울한 일을 행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디가 처음인지 모를 정도로 서로 주고 받으며 반복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서든 가장 억울하고 비통을 느끼고 분노를 일으키는 이가 바로 그 단계에서
부정관과 자비관을 통해 그것을 끊고 벗어 나와야 함을 말하게 된다.
○ 물론 말은 쉽지만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쉬지 않고 돌고 돌며 계속 확산되어 나가는 분노와 가해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자신이 지금 일으키는 분노나 악행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킬 이유나 원인을
자신의 앞단계의 누군가의 다른 악행에서 찾거나 돌리지 말야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이 지금 그 단계에서 분노를 억제하고
자와 비의 마음으로 대처해 그것을 극복해 벗어나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이 직접 분노가 일어나는 단계에서 자신이 먼저 이렇게 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본능의 충동과 감성의 요구를 거슬러 나오는 것이 되므로,
널리 공감을 받기도 힘들다.
그러나 바로 한 개인이 끝없는 악순환을 끊고 벗어나올 수 있는 방안이며
모든 악순환을 해결할 수 있는 첫 단계가 된다.
[ 요약 ] ○ 장기적인 면에서 비교 -자비관을 행하지 않는 경우 |
○ 자비관을 행하는 경우와 이와는 반대로 자비관을 행하지 않고 악에 악으로 상대하는 경우를
장기간에 걸쳐 비교해보자.
이들 각각의 장기간의 효과를 살필 때도 사정이 같다.
하나의 악행이 일어날 때, 이에 대해 어떤 심한 보복과 응징을 가하면,
그 보복에 성공한 이는 일시적으로 시원함을 느끼게 되고,
또 잠시간 그 상대의 또 다른 악행이나 반발을 억제하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도 이 모습을 보고 악을 행하는 것을 억누르게도 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악행을 행할 때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 두면,
피해자는 시원함을 느끼고,
또 그 상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적어도 그 동안만은 그가 또 다른 악행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를 보는 다른 이들도 이를 보고 악을 억누르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 모두에게 일시적으로 그런 악행을 억누르는 효과만 가질 뿐이다.
또 그런 상태에서 서로는 단지 악을 억누르고 억제하고 있을 뿐이며 선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억누르는 힘이 약해지면 그런 악은 다시 솟구쳐 터져 나오게 된다.
현실의 많은 선량한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도 사실은 내용이 같다.
선의 원리를 통해 선을 행하지 않고
단지 악을 행하려는 욕구를 자신보다 더 강한 힘에 의해 억눌린 채
살아가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그래서 그런 억눌린 상태는 외관상 선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악이 또 다른 더 강한 악에 의해 억눌려진 상태일 뿐이며,
그 실질 내용이 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억눌려진 악은 통제가 약해지면 곧바로 수많은 악한 욕구들이 분출되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게 되면,
그 통제와 억누르는 힘이 약해져
순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약탈을 하고 방화를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군인들도 군인들을 상대로 여기저기서 싸우지만,
민간인은 민간인대로 이들과 얽혀 여기저기서 서로 학살하고 학살당하는 모습을 쉽게 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악을 가하는 이들 하나하나에게도 다 원인이 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는데도 힘이 약해 보복을 가하지 못하고 억누르고 살아 왔는데,
전쟁이 재난등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되고,
자신이 일시적으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싶으면
과거의 가해자를 찾아 보복을 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피해를 당한 이 또한 그처럼 상대를 찾아 또 다시 보복을 가한다.
그처럼 서로 보복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시체 위에 다시 또 다른 시체를 얹어 놓고
그것을 서로 끝없이 반복하며 서로 고통을 주고 받다가
더 이상 시체를 쌓아 올릴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야
서로 마지못해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과 불쾌는 그렇게 행한 이후에도
서로에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고
원한 역시 잠시 억제될 뿐 쉬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올바른 해결방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 요약 ] ○ 장기적인 면 -자비관을 행하는 경우 |
○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그 원한은 쉬지 않고 세세생생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상속하여 돌아가게 된다.
오늘날 현실의 그 어떤 비극도 사실은 그와 같은 모습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제시한 해법을 행하기 어렵고 힘들더라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수행하고 훈련해서
이 악순환의 관계를 벗어나와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로 서로 상대를 지옥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악순환이
그 순간부터 멈춘다.
그래서 그 자신부터 그 악순환에서 바로 벗어나오게 되고
또 상대도 함께 벗어나오게 만들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부정관과 자비관은 탐욕과 분노를 다스리는 아주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불교 수행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에서 행하는 악순환의 계속적인 반복과 상속에서
모두를 벗어나오게 하는
가장 최초의 수행 방안이자 단계가 되는 것이다.
앞 글에서 말했지만,
가장 최초의 첫 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가에 따라
그 첫걸음의 방향의 차이는 아주 작고 미세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달하게 되는 최종 종착지의 내용은
아주 현격하게 차이나고 다르게 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불교수행 방안으로서
부정관과 자비관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 물론 여기에는 빠뜨린 내용이 하나 있다.
첫단계에서 누군가 탐욕과 분노를 극복하여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악행을 한다고 하자.
이 때 두번째 단계에서 이를 상대하는 이가
그것을 참고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고
자와 비의 마음을 일으켜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를 자와 비의 마음으로 대한다고 할 때,
이미 행해진 악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상대가 이후에도 계속해 또 악을 행하고 또 악을 반복해 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이를 어떻게 막고 예방할 수 있는 것인가.
○ 그런데 그 경우에도 방안은 앞과 같다.
역시 어느 경우에나 상대를 계속 자와 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단지 그가 이후에도 계속 악을 반복해 행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자와 비의 마음을 갖고
상대를 사랑하고 안타깝고 측은하게 슬피 여기는 마음을 꾸준히 갖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악으로부터 벗어나오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상대를 지혜와 교묘한 방편을 통해 선하게 이끌어 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 용어로 선교방편이란 용어가 그것이다.
이 역시 말은 쉽지만 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은 보복으로 악을 억눌러 외관만 선한 모습이 나타나게 하고
그런 상태에서 악순환을 무한히 반복하는 노력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더우기 그로 인한 결과와 그 이후의 결과를 계속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서로 현격하게 다르다.
따라서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그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비의 마음을 바탕으로
선교방편을 통해
자신과 남을 모두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마음을 일으켜,
그것을 다시 부단히 수행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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