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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글-게시판/근본불교_대승불교

불교수행-자비관 공부


● 자비관의 필요성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그가 대하는 모든 내용은 무엇이든 종국적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좋음(+), 나쁨(-),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0) 등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 좋음, 나쁨,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에 대해 각각 반응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독(毒)들이 발생하게 된다.



○ 예를 들어, 좋음을 대할 때,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알고, 그 좋음을 남에게 베풀고 함께 나누려고 하고,
규범을 지키고, 보다 더 선하고 좋은 것에 대해 집착없는 서원을 일으키는 자세를 갖는다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를 넘어 좋은 것을 자신이 반드시 차지하고 맛보아야겠다고 집착하고 달라붙는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이는 마음의 독으로써, 탐욕심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선한 경우에도 독이 되는데, 하물며 그것이 악한 욕심인 경우에는 더더욱 큰 독이 된다.



○ 나쁜 것에 대한 자세도 같다.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알고, 나쁜 것을 끊으려 하고, 다른 이의 나쁜 것을 끊게 하고 나쁨을 참고,[인욕]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나쁜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며,
자신과 남이 모두 선하고 좋고 좋은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쁜 것에 대해 성을 내 나쁜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고 표출하며, 분노하고 그 나쁨에 집착하고,
더 나아가 나쁨을 가져다 준 대상이나 상대를 파괴하고 해치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마음의 독으로서 성냄[분노, 瞋]인 것이다.
그 성냄이 악한 대상을 향해 악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다 해도 독이 되는데,
하물며 선한 대상을 향해 일으키는 경우에는 더더욱 큰 독이 된다.


이처럼 좋고 나쁨에 대해 일반인이 반응하는 여러 자세 가운데 탐욕과 분노가 독이 되고, 문제되므로
이 독을 다스리기 위해, 앞에서 부정관을 살폈고 다시 여기서 자비관을 살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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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 제공 by Lab value :  [ 추한 대상에 대해 자비관을 수행하기 위한 참조 사진입니다.]



● 자비관의 의미

○ 자비관[慈悲觀]이란 범어로는 maitrī-smṛti라고 하며 5정심관(停心觀)의 하나다.

일체 중생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고 생각하는 관법이고 특히 성냄이 많은 자가 성냄을 없애기 위해 닦아야 할 수행법이다.


● 자비의 개념


자비란 오늘날 많이 사용하는 말이고, 쉽게 생각하면 자비란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자비가 갖는 의미가 반드시 명료한 것은 아니다.

특히 자비는 부처님이 갖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 대자-대비-대희-대사 즉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에도 들어 있다.
여기서는 자와 비가 독립적으로, 나열되고, 다시 그것이 또 희와 사라는 의미와도 구별되어 네가지가 나열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자비란 말의 의미를 살필 때는 결국 사무량심의 자(慈 maitrī),비(悲 karuṇā),희(喜 muditā),사(捨 upekṣā)의 의미도 함께 살피는 가운데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자 비 희 사의 각 낱말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해지고 있지만,


먼저 자라는 용어는
마치 현명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갖는 사랑의 마음처럼,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상대에게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며
반대로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로부터 구제하는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갖는 의미가,
무언가 애착을 갖고 집착하여 감각하거나 소유하고 맛보려는 의미의 사랑, [ 사과를 좋아하는 이가 사과에 대해 갖는 애착, 사랑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실현시켜주어 단지 행복하게 해주려는 의미의 사랑, [ 애완견에 대한 사랑 ]

등등 여러가지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자[慈]가 의미하는 사랑이란, 
그런 탐욕과 애착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진정 위하여 상대를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마음,
그래서 마치 현명한 어머니가 그 자식을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는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앞과 같은 애착과 탐욕에 바탕한 사랑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부정관에서 끊어야 할 내용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종전의 해석을 참조하면 자-비-희-사의 개념은 사실 그렇게 서로 간에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혼동을 주는 측면이 많다.

우선 입장에 따라서는 중생에게 즐거움[낙]을 주는 것을 자라고 하고, 고통 불쾌[고]를 같이 느끼고 연민을 갖고 고통을 뽑아 없애주는 측면을 비라고 구별하는 입장도 있다.
또는 이와 정반대로 고통 불쾌[고]를 없애 주는 것을 자, 즐거움[낙]을 주는 것을 비라고 구별하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낱말상 희는 비와 상대되는 말인데, 이 희를 그런 기뻐함의 의미가 아니라, 상대에게 고통을 떠나게 하고, 즐거움을 주어 기쁘게 만드려는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는 일반적으로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원(怨)ㆍ친(親)의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으로 해석한다.

이런 종전 해석에 의하면 기쁨을 주려는 마음은
자도 되고 희도 되는 동시에
또 즐거움을 주는 마음은 반대로 불쾌와 고통을 뽑아주려는 마음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어서
결국 자의 마음은 비도 되어 이 모두가 서로 결과적으로 다 같은 의미를 중복 나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비-희 세 단어는 내용상 같은 것을 결국 여러 낱말로 중복 나열한 것처럼 되어 버린다.

 
또 한 수행자가 중생을 대할 때, 자비희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사에서는 평등하게 대하라 하고 자비희의 항목에서는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없애 주라고 하여 약간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된다.
즉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내용인가가 명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희와 비가 서로 상대되는 낱말이기도 하고, 평등하게 떠난다는 사는 또 사랑을 베푼다는 자나 비 희 등과는 조금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런 해석보다는 비는-슬픔 희는-기쁨이란 의미를 그대로 의미하여 서로 대칭되는 의미로 구별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 그래서 비(悲)란 다른 이들의 악,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에 대하여 같이 그것을 같은 입장에서 동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슬픔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그리고 희(喜)란, 다른 이들의 선, 지혜, 행복, 즐거움, 이익에 대하여 그것을 같은 입장에서 동감하고 같이 기뻐하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그리고 사(捨)란, 선도 악도 아니고 즐거움도 고통도 아니고 중립적이고 무가치한 것에 대하여 평등함을 느끼는 가운데
이 둘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본래 자(慈)란 이미 앞에서 보듯
마치 현명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때 갖는 사랑의 마음처럼,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상대에게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며
반대로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로부터 구제하는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는 즐거움을 주거나, 고통을 빼주거나..하는 마음이 함께 포함되어 들어 있다.

그래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자, 고통을 빼주는 것은 비 이렇게 구별하지 않고
이 모두는 결국 같은 내용으로서 자의 마음이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을 실제로 행해
선(善), 지혜(智慧), 행복(幸福), 즐거움, 이익을 베풀어주며
반대로 악(惡),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로부터 구제하여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끄려는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서는 그렇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이미 벌어진 과거 일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그것이 변경 가능한 일일 때, 상대를 변화시켜 최상의 상태로 이끌려 노력하는 마음이 자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선, 지혜, 행복, 즐거움, 이익을 주거나 악, 어리석음, 불행, 불쾌, 손해를 빼주는 것이 곤란한 경우에는
단지 그 상태에 어떤 감정을 대하여야 하는가만 남게 된다.

그래서, 변경가능하지 않는 나쁘거나 악한일, 좋고 선한 일, 그리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각기 가져야 할 마음으로
비-희-사를 대치시켜 나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이런 경우에서,
악하거나, 나쁜 일에 대해,,슬픔[비]의 마음을 갖고 대하고,
선하고 좋은 일에 대해,,기쁨[희]의 마음을 갖고 
그리고 가치없는 일에 대해,,평등하게 버림[사]의 마음을 갖고 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때 자-비-희-사가 같은 의미를 갖는 내용을 표현만 반복해서 나열한 것으로 해석하지 않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각각 다른 상태에 대해 이렇게 자-비-희-사의 마음을 갖고 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한 주체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비희상의 마음을 늘 함께 지녀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들 각 마음이 한 주체내에서 서로 분리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각의 상태에 따라 특히 가져야 할 마음상태가 조금은 다르게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비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희나 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희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비나 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사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때 비나 희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위와 같이 나누어 본 것이다.


○ 그리고 지금 다시 자비관의 자비란 말을 대하면,
이것이 나쁜 상태에 일으키는 성냄의 독을 대치해 치료할 때 사용하는 수행방안의 의미가 뚜렷히 나타난다고 본다.


원래 나쁜 상태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갖기 쉬운 마음 상태란,
나쁨을 참지 못하고 그 나쁨의 감정을 억눌러 참지 못하고 밖으로 드러내 표출시키고 불쾌함 속에서 분노를 떠트리고
다른 대상을 파괴하거나 해치는 행위를 하고
그 나쁨을 가져다 준 대상에 미움과 원망을 품고 해치는 마음을 갖기 쉽다.

넓게 보아 이것을 분노[성냄]의 마음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이렇게 싫고 불쾌한 상태에 직면하지만,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게 억눌려지거나,
그 주체가 그 나쁨이나 불쾌함이 변경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그 나쁜 대상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슬픔[비]이나 울음의 형태로 표출되게 된다.

크게 보면 분노와 슬픔은 나쁨에 대해 반응하는 마음상태인 점에서는 같으나,
분노는 외부로 다른 대상을 해치는 기능을 갖는 것이지만,
슬픔은 억제되는 가운데 그 나쁨에 대해 반응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자비에서의 비란, 결국 나쁨에 대해, 성냄을 일으키지 말고,
기본적으로 자의 마음, 그리고 비의 마음으로 이를 대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자-비-희-사의 내용 가운데,
나쁨에 상대하므로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사랑의 자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
기쁨의 희나 버림의 사가 함께 들어오지 않고
슬픔의 비까지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 자비관을 행하는 방안

○ 현실적으로 성이 날 때 어떻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 자기자신의 생명과 신체, 자신의 재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 자신의 희망하는 상태 등에 대해 좋아하고 집착을 갖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것들이 침해될 때 그것에 대해 싫어하고, 또한 성을 내게 된다.


그리고 외부 현상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는 것이 힘들지만,
또 자신의 마음을 뜻대로 바꾸고 조정하는 것도 그 만큼 힘들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나 재물들이 침해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성을 내지 않고, 참고 중지하는 것은
말처럼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원치않고 불쾌한 상태를 대하여
성을 내지 않고 참고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으며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더 나아가 상대와 자신을 모두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들이려는 마음을 가지려면,
평소에 이런 불쾌하고 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를 참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훈련을 부단히 행해야 한다.


그것이 곧 수행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목표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화가 나는 상황에서 그런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특히 누구나 집착을 갖고 아끼는 자기자신의 생명과 신체, 재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침해가 일어날 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 가장 먼저는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애착을 갖고 집착을 하기 쉬운 대상들에 대해서 부정관을 사용하여 집착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잘못된 분별에서 이들 집착이 시작되게 되는데 근원적으로
계분별관 인연관등을 사용하여 자신이 집착하는 것에 대해 올바로 분별하여 집착을 근본적으로 끊는 것이
필요하다.




○ 두번째는 현상에 대해 좋고 나쁨을 판단함에 있어서,
나쁨을 대하여 그 나쁨을 완화시켜 받아들이고 좋음을 취하는 방편을 사용할 수 있다.


분명히 나쁘다고 받아들이는 상황에 대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좋음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대할 때-- 그것이 나쁘게 생각되지만, -

□ 그것이 그 안에 숨겨 갖고 있는 좋은 측면을 찾아내 보는 것
□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
□ 더 나쁜 것을 생각해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다른 나쁜 것들을 생각해서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만일 이것이 아니었으면 대신 있었을 다른 나쁜 것들을 생각해서 그것과 비교해 생각해 보는 것
□ 이미 이루어진 다른 좋은 것들을 꺼내 생각해 보는 것
등이 좋음을 얻어내는 방안이 된다.




○ 한편 자비심을 일으키는 또 다른 방안으로 3가지 인연을 들기도 한다.

3연자비(三緣慈悲)라는 것으로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법연자비(法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가 그것이다. 


○ 중생연자비는 상대를 자신과 친한 이와 똑같이 보아 베푸는 자비를 말한다.

○ 법연자비는 온갖 현상이 사실은 색수상행식 5가지요소가 거짓으로 일시적으로 화합한 것임을 알고 그 실체는 없으며 또한 그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空)한 줄을 깨달아 알고, 집착과 번뇌를 없앤 성자(聖者)가
그런 바탕에서 일으키는 자비를 말한다. 

○ 무연자비란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의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깨달아 아는 부처님이 일으키는 자비를 특별히 가리키는 말이다. 즉 부처님이 일체 중생에 대하여 평등하게 일으키는 자비심을 뜻한다.


여기서 일반인이 갖는 자비를 보통 중생연자비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화가 나는 상대에 대해 보통사람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보통의 원인이 이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견해가 달라 다투거나, 
이해관계가 달라 대립하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물, 가족, ,,,등을 침해하는 상대를 상대해서,
자비를 일으키는 경우는,

그처럼 자신과 입장이 반대되는 상대의 입장에 자신이 들어가고
상대의 입장에 자신을 위치해 넣고 그 입장을 헤아리고 [역지사지]
상대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같이 만드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감, 동감]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 들어가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는 가운데에서야 비로소
상대의 잘못에 대해서도 상대가 향하는 나쁜 상태에 대해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상대를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처럼 최상으로 만들고 이끌려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런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방안을 통해서 화가 일어나고 성이 날 때
자비의 마음에 도달하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해야 한다.


● 결국 자비관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을 다 함께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에 함께 이르도록 이끄려는 자[慈]의 마음과,
그렇지 못한 상태- 즉 악하거나, 어리석거나, 불행하고 불쾌와 고통 손해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비[悲]의 마음을 기본으로 갖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싫어하고 나뻐하는 상태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기 쉬운 상태에 처할 때,

앞과 같은 여러 방편을 써서 나쁘게 느껴지는 상태로부터 숨겨진 좋음을 찾아 내거나,
또는 상대와 같은 입장으로 상대와 공감하는 자세를 갖거나,
일체가 무상하고 실체가 없고 공하다는 관을 통해 근본적으로 집착과 번뇌를 벗어나거나,
다시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일체에 대해 차별된 견해를 버리고 일체를 평등하게 최상으로 이끌려는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 등등을 통하여


이를 분노와 미움, 원망, 증오, 등으로 상대하지 않고, 
분노를 일으키거나 상대와 다투거나 해하려 하지 않고, 참고 억제하고 멈추며,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상대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상대에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지혜와 방편을 써서,
상대를 나쁜 상태에서 끌어내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에 함께 이르도록 이끌고 노력하는 
자(慈)와 비(悲)의 마음을 함께 일으켜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 자비관의 성격 :

자비관은 불교의 기본 수행방법으로서 5정심관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지도론 1 권에서는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등이 각각의 번뇌상태에 대응하여 사용하는 수행법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약초와 음식은 냉병(冷病)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이,

불법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것도 그와 같아서

부정관(不淨觀)을 생각하는 것은 탐욕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이 되지만

성내는 병에는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대치방법도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몸의 허물을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인데

성낸 사람이 그 허물을 관찰하면 성남의 불길이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비관(慈悲觀)을 생각하는 것은 성냄의 병에는 좋은 대치방법이 되지만

탐욕의 병에는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대치하는 방법도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자심은 중생에게서 좋은 일을 구하고 공덕을 관찰하는 것인데

만일 탐욕이 있는 이가 좋은 일을 구하거나 공덕을 관찰한다면 탐욕이 더욱 늘기 때문이다.

 

인연관(因緣觀)의 법은 어리석은 병에는 대치하는 법이 되지만

탐욕과 성내는 병에는 착한 법이 되지 못하며 대치하는 법이 되지 못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부터 삿되게 관찰했기 때문에 삿된 소견을 내었나니,

삿된 소견이 곧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출처: 대지도론 -1권. 서품(序品)중

 

 


web: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457936

 


 


P 진리를 고루고루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