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관2- 불교는 과학인가. 종교인가
[ 요약 ] ○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과관계의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 |
우리는 현실에서 불을 원하면 라이터나 성냥을 켜서 불을 얻는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의 문제는
현실에서 우리가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쉽게 이를 이용하며 살아가는 문제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자세히 생각하면 매우 복잡하다.
실제로 현실에서 우리가 원인-결과의 관계만 잘 알면 매우 잘 살 것처럼 생각된다.
우선 매주 복권번호가 결정되는 관계도 사실은 원인-결과관계다.
그래서 이것을 정말 매 번 잘 예측할 수 있다면 매주 거금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복권의 당첨확률은 몇백만분의 1의 확률이어서 정확히 맞추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은 인과관계의 문제며
또한 그 하나하나의 내용은 사실 복권당첨 번호가 결정되는 관계만큼 복잡하기도 하고 또 그 만큼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라면 어떤 주식을 사고 팔아야 하는가의 문제도 사실은 내용이 같다.
그리고 사업을 경영하는 이가 어떤 사업에 투자를 하고 어떻게 사업을 해야 번창할 것인가의 문제도
사실은 인과관계의 어려운 문제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어려운 문제는
결국은 이런 인과관계의 판단 문제와 관련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불교에서 문제삼는 수행목표와 실현방안의 문제도 같다.
즉, 생사를 포함하여 어떤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문제도
결국은 이런 인과관계의 판단 문제에 달려 있는 것이다.
○ 인과관계의 판단은 어느 하나의 A를 그 A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게 하지 않는다.
그 A가 결과로서 B 와 C, D를 가져온다면,
그 B와 C D....를 모두 그 A와 관련된 내용으로 묶어 이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과관계에 의한 판단결과는
단지 하나의 A만 보고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판단하여 목표를 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된다.
세상의 삶에서 안타까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각 개인이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을 잘못 행하거나
또는 짧은 원인 결과만 얕게 판단하고 행하기 때문에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불교가 세속에서 향하는 목표와 다른 상태를 목표점으로 정하고
다른 내용을 수행 실천하도록 제시하는 바탕에는
이런 인과관계의 판단이 그 바탕에 들어 있다.
□ 예를 들어 불교에서는 생명이 살아가는 여러 세계를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고통을 아주 극심하게 오래 오래 받는 지옥이나 아귀 축생과 같은 상태도 제시하지만,
또 반대로 수명이 길고 길며 복된 생활을 하는 수승한 상태로 여러 하늘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그 가운데 욕계의 하늘 가운데 하나인 타화자재천은
그 수명이 매우 길고 복되다고 한다.
즉
"인간의 천 6백 년은 타화자재천의 하루낮 하룻밤이다.
이와 같이 30일을 한 달, 열두 달을 1년으로 하여 타화자재천의 수명은 1만 6천 년이다......"(신수 2-219b)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타화자재천의 평균수명을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92억 1600만년에 해당하는 믿기지 않는 매우 긴 기간동안 복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타화자재천과 같은 하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이런 하늘과 같은 여러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수행목표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처럼 하지 않는 이유도
사실은 앞에서 살핀 인과관계의 판단과 관련된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여러 상태를 판단할 때
타화자재천 등과 같은 여러 하늘의 상태도 좋지만,
더 좋고 좋은 상태가 있으며,
또한 예를 들어 타화자재천에서 어리석고 악한 이들이 삶을 마치면
그들이 다시 지옥, 축생, 아귀 속에 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하나의 상태만 본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인과관계를 묶어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과관계의 판단이 매우 중요한 내용이 된다.
○ 인과관계를 올바로 깊고 깊게 잘 판단해야 올바른 목적 설정이 가능하고,
또 그 목적을 실현할 올바른 방안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을 잘 실천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인연관이란,
결국 이 인과관계의 내용을 정확히 잘 살피는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 요약 ] ○ 불교의 과학적인 측면 |
○ 그런데, 인연관의 문제를 살피다가,
갑자기 불교는 과학인가 종교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불교는 많은 종교 가운데 비교적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불교가 세상의 많은 문제에 대해
신비적이고 독단적인 주장을 제시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진리를 중시하고
또한 세상의 변화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그런 바탕에서 올바른 목표와 실천 방향을 제시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불교가 무엇보다도 진리을 중시함은
부처님이 남긴 유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부처님이 스스로 제자들에게 부처님자신을 맹목적으로 맹신하여 의존하지 말고,
그 보다는 진리[법]에 의존하고, 자신에 의존하여 올바로 생활할 것을 강조할 것을
유훈으로 남기고 있다.
불교는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달리한다.
■ 사람들은 사실
수많은 자연현상이나 세상의 모습을 대하면서 세상은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가.
또 이들은 어떤 상태를 향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와 같은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자신은 또 어떤 상태를 향해 어떻게 노력해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을 갖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갖는 이런 의문에 대해서
많은 종교는 이 세상과 모든 생명이
모두 어떤 절대자의 뜻에 따라 창조되고 또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지진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절대자의 뜻이 그런 것이고,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또 누군가 태어나고 죽는다면
그것도 모두 어떤 절대자의 뜻이 그런 것이다......
결국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그런 절대자의 뜻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 사실 , 매우 복잡한 우주의 모습이나,
정교한 생명과 매우 치밀하게 기능하고 작동하는 여러 신체기관의 모습과 기능들을 생각하면,
이것들이 과연 인과관계를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믿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그렇기에, 그런 복잡하고 정교한 우주와 생명들은
그런 복잡하고 정교한 내용들을 미리 설계하고 계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높은 지혜와 능력을 갖춘 절대자의 창조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 끝에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갖춘 어떤 절대자를 찾고
또 그런 절대자를 믿고 의존하는 종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그런데 사실 이런 추리와 대답은 자기 모순적인 내용이 된다.
우리는 처음 매우 복잡한 우주의 모습이나, 또는 매우 정교한 신체기관을 가진 생명체를 본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갖춘 이를 먼저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
복잡한 이런 것을 창조해낸 이런 존재가 다시 존재하기 위해서
다시 이를 창조한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능력있는 또 다른 존재를 추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추리는 다시 더 뛰어나고 더 능력있는 다른 존재를 향해 무한히 추리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이런 무한한 추리는 어느 시점에서 포기된다.
그리고 결국 어떤 극한적으로 뛰어난 존재는
그 존재를 창조해낸 또 다른 뛰어난 존재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면서,
또 한편으로 남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서 멈추게 된다.
□ 그런데 이런 주장은 앞에서 행한 추리와는 모순되고 반대되는 결론이 된다.
즉 어떤 복잡하고 뛰어난 존재는 그 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창조해 만들어 내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처음의 생각과는 모순되고 어긋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것을 인과관계의 문제로 제시한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수많은 현상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독단적으로 계획하거나 창조한 내용으로 보지 않고,
무수한 겁에 걸친 인과관계에 의한 결과로 본다.
□ 우리가 대하는 현재와 그 이전의 앞 시간과 또 그 이후의 뒷 시간을 구성하는 재료는 사실 같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습은 변화해도
그 앞과 뒤의 재료는 늘거나 줄지 않는다. [부증불감]
그리고 시간은 앞으로 뒤로 무한히 열려 있다. [무시무종]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은
그 이전에 무수한 윤회과정을 되풀이 한 결과 오늘 이 순간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경전에서는 한 사람이 생을 마칠 때마다 흘린 피를 모은 것과,
큰 바다의 물의 양을 비교하면 윤회를 통해 흘린 피가 바다보다 더 많다고 설한다. (2-240b)
그 만큼 각 생명은 무수한 윤회과정을 반복해 온 것이다.
□ 이전 글에 수행을 시작한 후 수행을 완성하기 위해 3 아승기겁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아승기란 숫자의 크기와 시간 단위로서 겁이 매우 많고 김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러나 이 3 아승기겁이라는 긴 시간도
앞 뒤로 무한하고 무량한 시간에 비교하면
거의 한 순간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제시한 타화자재천과 같은 수승한 하늘이
92억년에 걸쳐 수명을 누릴 수 있다 하여도,
불교에서는 큰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 결국 불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펼쳐진 이 무량한 시간대에 걸쳐
윤회를 반복하는 생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고,
또 그런 수많은 상태 가운데 어떤 상태에 이르러야 가장 좋은가를
인과관계 판단을 통해 제시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 불교가 진리를 중시하는 면은
현실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 내용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불교가 가장 근본적으로 제시하는 기본적 판단에 법인설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 그 현상면 실체면, 실재의 측면 그리고 가치의 측면들에서,
각기 무상, 무아, 무자성, 공, 고, 열반,등의 진리의 내용을 기본적으로 판단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그 내용은 사실 사람들이 갖는 희망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 예를 들어 사람은 영원한 것을 바라는데,
일체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밝힌다. ( 제행무상)
□ 사람은 자신에게 자신만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러나 나와 외부 모두에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다고 밝힌다. (제법무아, 무자성)
□ 사람들은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실재 내용이
현실에서 대하는 현상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내용이라고 추리하고 믿고 싶어 하는데,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실재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밝힌다. ( 일체개공)
□ 사람들은 현실 세속에서 얻는 수많은 종류의 이익과 즐거움을 구하며 찾고
또 현실의 삶이나 내세의 하늘의 삶을 낙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추구해 얻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것은 고통이거나 나중에 긴 고통을 주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고
그것의 대부분을 끊고 버려야 할 내용으로 본다. (일체행고)
그리고 적정한 열반의 상태를 수행을 통해 실현해야 할 목표로 제시한다. (열반적정)
...
이처럼 불교가 제시하는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갖는 희망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 그것은 불교가, 사람들이 희망하는 내용에 맞추어 세계관을 그려 꾸며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모습을 제시하고,
그런 가운데, 올바른 목표와 실현방안을 제시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바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어렵고 힘든 모든 것을 부모에게 믿고 맡기고
그리고 자신은 편안히 이에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을 행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한 상태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의 절대자를 믿고 기도를 행하면,
그것이 쉽게 낫고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자세를 원칙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수행방안에 있어서도
악을 행하고서 기도나 신앙만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고 밝히고,
그것은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고
기도를 한다고 하여 그 돌이 떠오를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오직 진리와 진리에 바탕을 둔 올바른 수행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제시한다.
□ 그리고 윤회과정과 삶에서 받게 되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어리석음이라고 제시하고,
스스로 지혜를 밝혀 진리를 찾고 자신과 진리에 의존할 것을 강조한다.
□ 이런 측면들은 모두 불교가 어떤 신비적인 믿음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기를 바라는 일반인들의 희망에 부합하지 않고,
그 보다는 객관적인 진리와 그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래서 불교는
세상과 삶의 여러 문제를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주장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해결하려는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객관적인 진리에 의존해 문제해결을 해나갈 것을 강조하는
과학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지금 살피고자 하는 기초 수행방안
인연관이 바로 이런 입장에 직접 관련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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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 ○ 불교의 종교적인 측면 |
● 그런데 한편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불교가
순수한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나 과학의 영역에 남아 있지 않고,
왜 종교의 영역에 남아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선 불교에서 제시하는 많은 내용이
관찰과 경험 추리 추론을 통해서 그 진리성이 확인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결국 이런 내용을 제시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저 믿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의 신앙선택의 문제가 되게 된다.
○ 또 불교가 제시하는 내용은 단순한 이해나 앎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목표를 정하고 실천해야 할 내용
또는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내용으로서 제시된다.
이런 점은 다른 일반 과학이나 학문지식과 조금 성격이 다른 측면이다.
○ 또 이외에도 불교에서는 많은 보살과 부처님이 수행과정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양한 서원을 갖는데,
이 서원의 내용에 불교신자들이 믿음을 갖고 의존하는 측면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보살이 수행을 시작할 때 서원을 세우기를,
자신이 수행을 완성해 부처가 되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들의 병을 낫게 해주고 그리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정진하고 완성하였다면,
중생들이 이런 서원을 세운 보살에 대해 믿음을 갖고 의존하면서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 기도하며 의존하는 측면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결과적으로 일반 타 종교와 같이
종교인들이 절대자에게 믿음을 갖고 의존하는 타력신앙의 측면이 나타나게 되고,
불교의 가르침도 이와 동일하게 기능하는 측면이 있게 된다.
□ 그래서 결국 이런 여러 요인으로 인해
불교가 단순한 과학이나 학문 지식이 아닌
수행 실천과 믿음의 종교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불교가 여전히 다른 타력신앙과 다른 것은
보살의 서원이나 그에 대한 믿음이나 의존이
결국은 수행자의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어 완성하는 데에
목적이 두어진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 생각해보면,
앞에서 불교가 제시하는 근본 진리의 내용으로서
무상, 고, 무아, 무자성, 공 등의 내용은
사실 현실 경험에서 그리고 관찰과 사색 추리 추론 검증을 통하여
충분히 그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가르침이 사람들이 경험가능하지 않는 내용에 대하여도 제시되고 있고
그것은 결국 다른 종교의 주장 내용처럼
믿음 또는 믿지 않음의 선택문제로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예를 들어 세상은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성되어 있고
생명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상태를 윤회한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그런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 또한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과관계의 내용도
기본적으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라는 기본 내용이 제시하듯 간명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그런 관계에 해당하는가에 관해서는
역시 대부분의 사람이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 앞에서도 이런 예를 들었지만,
예를 들어 다음 주 복권당첨번호는 무엇인가..다음 주 어떤 주식이 가장 급등할 것인가..
내년에는 어떤 지역이 부동산 가격이 가장 많이 상승할 것인가. 내년에는 어떤 곡식이 가장 오를까..
내년에 정치상황은 어떻게 될까.
모두 궁금하다.
그리고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잘 안다면,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다음 부딛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사실은 그 내용을 잘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현실의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사정이 이렇다.
그러나 이런 현실 삶에서의 인과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삶과 죽음에 걸쳐 살아서 어떻게 행하면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 등등의 인과 문제에 들어가면,
그 어려움은 더욱 증가하게 된다.
▼ 그런데, 불교의 연기관은 이런 내용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에 걸쳐 한 생명이 3계 6도에서
죽은 후 어떻게 되어 어느 세상에 태어나고,
태어나기 직전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태어나고 ,,,등등까지 포함해 설명한다.
▼ 그리고 불교에서 이 인과관계의 내용을 대표적으로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의 관계로 12 연기의 내용으로 제시하지만,
그 구체적 의미와 내용 역시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인과관계에 대한 내용은
불교가 비교적 과학적이고 진리에 입각한 종교의 특성을 갖기에
매우 엄밀하게 추구되고 제시되는데,
그 구체적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일반인으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그리고 지금 살피고자 하는 인연관은
기본적으로 생사윤회과정에 걸친 원인-결과 관계에 대한 내용을 관하는 수행방법이다.
그런데 이 윤회과정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살피려면,
우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가운데 그 과정을 기억해내는 힘이 있거나
이를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힘과 능력을 대부분 갖지 못한다.
심지어 죽고 나서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현상이 정말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이 자체부터도 의문을 갖게도 된다.
대부분 이런 상황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다루는 인과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 그런데 가정하여 누군가는 수행을 통해서 죽고 사는 과정을 파악하는 힘이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태에서 그가 그 관계를 관찰하고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개인의 사항에 그치게 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하면, 그 설명을 듣게 되는 다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직접 생사 과정을 파악하는 힘이 없는 상태이고,
그래서 이 내용에 의심을 갖고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가 그 의심을 풀려면 그 자신이 직접 그 과정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렇게 관찰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이는
그 내용을 직접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하는 이는 그런 내용은 여전히 직접 관찰해 확인할 수 없는 내용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는 그런 내용은 결국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문제로 남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정이
불교에서 제시하는 생사 윤회과정에 걸친 인과 내용에 대한 가르침들은
일반인 대부분에게 그 내용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문제와 신앙문제로 남게 되는 연유가 된다.
□ 수행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상태도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6신통과 같은 경우도 그것을 얻은 자는 그것이 진리임을 인식한다해도
얻지 못한 일반인 대부분은 여전히 믿음과 믿지 않음의 선택문제로 남는다.
○ 불교의 많은 내용에는 직접 관찰하지 않는다해도 진리로써 성립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교가 과학이나 진리 학문 연구나 응용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고
종교의 영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많은 내용이 이처럼 직접 관찰가능하지 않고 믿음(信)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사 인과과정에 대한 이해에는 이런 어려움이 특히 많이 내재하게 된다.
또 생전 사후 문제에 관해서는 각 종교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기에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주장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에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밖에 없게 된다.
○ 결국 불교와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영역에 대해 행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내용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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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 ○ 불교의 연기론(인과관계론) 연구의 어려움 |
● 앞과 같은 사정이 있기에 이 연기론의 연구작업도 사실 어려움이 기본적으로 있게 된다.
심지어 몇 생을 반복해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더라도
생사과정에 대한 인과관계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해 정리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많다고 본다.
그래서 실제 관찰 가능하지 않은 영역에 대한 내용을 연구하거나 제시함에 있어서는
많은 고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 결국 간단히 말하면 이들 내용에 관해 부처님은 진리를 말하신 것인가..아니면 거짓을 이야기한 것인가의 어려운 판단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부처님이 말씀하신 많은 내용 가운데 직접 관찰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또 각 종교마다, 이에 관해 주장하는 내용들이 수없이 많고 서로 각기 다르다.
그리고 이들은 각 개인이 하나의 종교를 선택 결정하는데 가장 기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 예를 들어 부처님은 수많은 하늘이 있고
욕계에는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이 있고
그 이외에도 색계 무색계에 많은 하늘이 있다고 하며,
그외에도 아귀계나 아수라, 지옥의 존재 등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과연 정말일 것인가?
□ 연기관계(인과론)도 그 기본적 내용은 과학적이고 쉽게 진리판단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들은 많은 내용이 이런 신앙의 영역에 함께 걸치게 된다.
인과의 내용이 현실에서 경험가능한 내용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사 윤회과정에 걸친 내용을 폭넓게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생에서 이러이러하게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으면 그 결과로 이러이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정말 옳은가?
□ 그리고 이러이러한 수행을 통해 열반의 상태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윤회와 인과관계 가운데, 왜 그런 열반의 상태를 목적지로 정해야 하는가.
그 열반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과연 그런 수행으로 성취가능한 것인가.
등등도 모두 의문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내용들이 하나같이 지금 당장 직접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생사를 반복하면서 수행하고 그 결과를 얻는 과정이
마치 물건 목록을 보고 상품을 고르는 것과 같다면,
의심이 나면 직접 백화점에 가서 그 물건을 살펴 보거나,
잘못 주문해 물건을 샀으면 나중에 반품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걸쳐 각 종교가 제시하는 내용과 관련해서는
불행하게도 그런 수단이 제한된다.
그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같은 성격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불교와 관련해서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정말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가
현실에서는 해결하기 힘든 의문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믿는다면 불교를 믿는다는 것이고 아니면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처음 인연관 수행을 살피면서 이것을 완성하여 글을 올리는 것이
몇 생을 반복해서 연구를 한다해도 어려움이 많다고 했는데,
그것은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 또 인과관계에 대한 논의가 어려움을 많이 일으키는 것은
이런 기본적 문제 이외에도
이론상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수많은 철학적 난제들과도 같이 관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간단히 그 내용을 살펴본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무엇을 원인-결과의 관계로 보는가에 대해서도
서양 철학자나 논리학자들의 견해와 불교의 입장은 많이 다르다.
비록 같이 원인, 결과의 문제를 살핀다고 하지만, 그 기본입장이 다른 것이다.
간단히 살피면 인과론을 주장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기계적 인과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인과관계 이론에 의한 결정론 필연론 숙명론 운명론에 빠져들어가게 된다.
즉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관계에 묶이므로,
인과관계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런 인과관계에 의해 묶이고
그러그러한 모습들이 필연적으로 나타나도록 사전 결정되어진 것이고,
개인도 역시 그런 필연적 인과관계에 묶이고 운명적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현상이 변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 우선 원인- 결과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의 논의부터 시작해서,
- 다시 그 인과 관계를 반드시 필연적인 관계로 보아야 하는가 우연적인 관계로 보는가.
- 결과는 사전 결정된 내용으로 보는가. 그렇지 않은 내용으로 보는가.
- 개인의 삶과 관련하여 개인에게 자유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 나타나는 결과를 그 개인의 운명적인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는 것으로 보는가.
등등의 여러 어려운 문제가 모두 이에 관련된다.
이들 하나하나 매우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 부처님은 비록 현상이 나타나는 관계를 인과(연기)관계로 보지만,
그러나 각 개인이 그 연기관계에 숙명적으로 묶이는 관계로 보지는 않는다.
□ 그러나 이와 달리, 인과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기계적 인과론에 의해 숙명론 결정론의 내용으로 많이 이끌려 들어간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검증되지 않은 사변적 주장들을 인과관계의 내용에 덧붙여 포함해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인과관계(연기관계)에 대한 내용과는 다른 결론이 이끌어지는 것이다.
▼ 간단히 말해 철학자들은 A에서 B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해석에서,
A라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항상' B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관계를 인과관계의 내용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필연 우연 등의 주장을 행한다.
그런데 필연이란, A 다음에 B가 나타날 때 그 상태에서는 다른 C, D 등이 나타날 가능성이 없고,
그래서 항상 예외없이, A 다음에 B가 나타남을 말한다.
또 우연이란, A에서 B가 나타날 때 그 상태에서는 다른 C, D 등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 그 상황에서 A 다음에 B가 (우연히)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필연이나 우연을 주장하는 각 주장 속에는,
그 주장 내용의 전제로 '다른 C, D 등이 나타날 가능성'의 유무판단이 전제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변적인 내용이다.
□ 한편 불교에서는 인과관계를 실재의 내용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상에서 대하는 A나 B의 모습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모두, 실재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인과관계를 통해 이해하는 것처럼 서로 직접 관련하고 작용하는 내용들이 아니다.
▼ 예를 들어 망치로 못을 박거나 불을 종이에 붙이거나 할 때,
우리는 이들 망치나 못, 불이나 종이가 서로 직접 관계하여 작용을 미치고 주고 받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 그것은 모두 실재내용이 아니며, 실체가 없지만,
그러나 마치 있는 것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나타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마치 비유하면 만화책에 그려진 앞장의 내용과 뒷장의 내용이 갖는 관계와 같다.
그래서 앞장에서 망치로 못을 때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 뒷장에는 못이 나무에 박여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만,
이 만화책에 그려진 망치나 못들은 서로 때리거나 박는 작용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현상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와 같은 관계로 이들이 서로 파악되면 이들 내용들을 연기관계로 묶어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연기관계는 앞에서 철학자들이 본 실재적인 인과관계의 내용
또는 기계적 인과론 그리고 그런 인과적 내용이 주장하는 필연론 숙명론 결정론 등의 결과에
빠지지 않는다.
□ 그러나 이외에도 불교 안에서 이 인과(연기)에 대한 해석 문제는 매우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어 있고
이들 문제는 하나같이 어려운 문제들에 속한다.
□ 가장 기초적으로는 근본불교에서 제시된 12 연기에서
각 단계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다.
무명-행-식-명색-6입-촉-수-애-취-유-생-노병사로 제시되는 내용도
이 각각의 단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들이 어떤 관계의 의미로 원인과 결과로 제시된 것인가 등에 관해서도
논의할 내용이 많다.
□ 이외에도 불교의 연기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업감연기론,
유식불교에서의 아뢰야식연기론,
여래장설에서의 진여연기론
화엄불교에서의 법계연기론
밀교에서의 6대연기론,
등등이 모두 이 연기(인과관계)에 대한 내용들이다.
이 하나하나가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따라서 연기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 안에서도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 한편 수행을 통하여
현상에 존재하는 인과의 관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문제다.
[ 요약 ] ○ 불교의 연기론(인과관계론) 연구의 필요성 |
□ 어려움이 많은데도 왜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실 처음 현실에서 제기한 문제와 같은 성격을 갖는 문제다.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원인이 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아는 것은
삶을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하게 사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이가 복권 당첨번호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안다면,
그 번호를 적어 넣어 수십억원의 복권당첨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식도 사업투자도 마찬가지다.
다른 삶의 부분도 다르지 않다.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사실은 이런 인과 판단의 연속에 걸쳐 있다.
그래서 그것이 확대되어 생과 사의 문제에 걸쳐 가장 깊고 올바른 지혜에 이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당장 그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생과 사에 걸친 인과의 문제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 사실 문제 성격이 생과 사의 문제에 걸치고
윤회과정에 관련된 인과판단 문제가 되면 그 참거짓 판단 문제에 대해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예를 들어 이번 생에서 과연 살생을 하면 정말 지옥에 가는 것일까. 아니면 아닌가.
사실은 그냥 살생해도 괜찮고 오히려 그것이 잘 사는 길인가?
사는 동안 아무렇게나 행하고 살다가 죽더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와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은 아닌가?
이런 간단한 질문에 앞에서 제시한 그런 많은 여러 논의와 고민이 담기게 된다.
▼ 사실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얻고 믿는가에 따라,
현실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위 두 경우가 서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믿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렇게 악을 행하고 사는 것이 현실의 삶을 더 이익되고 잘 살아가는 방안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살생을 마음껏 잘 행하려 하게 될 것이다.
또 반대로 다른 내용을 믿는다면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취하게 될 것이다.
▼ 이처럼 인과의 문제는 어렵기도 하고, 또 현실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앞에서 본 과연 부처님은 진리를 말하신 분인가..아니면 거짓말을 이야기하시는 분인가가
중요한 의문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대부분 수행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이고,
그래서 긴 시간과 생사과정에 걸쳐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지 못한 상태이므로,
위와 같은 의문에 결론을 확고히 내리지 못하게 되고,
또 그러기에, 그 내용들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문제삼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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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 내용을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각 개인 입장에서 그에 관한 판단내용은 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인연관의 수행이 이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들 내용에 관해 완성되고 확정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 사정은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문제를 불교가 갖는 과학적 성격과 종교적 성격의 문제로 살핀 것이다.
[ 요약 ] ○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참거짓판단의 보조수단 |
● 생사윤회와 관련된 인과 문제는 각 개인이 직접 관찰하여 살필 수 없는 영역의 문제다.
그렇기에 각 개인은 이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이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가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신앙 선택문제가 된다. 즉 각 개인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문제로 되는 것이다.
● 다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보조적 해결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 우선 불교의 가르침이 이런 부분들에서 '거짓'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이 어떤 목적과 이유에서 행해졌을 것인가를 역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떤 거짓말을 할 때는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통해 이익을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등등 다른 목적이 있는 경우다.
또는 자신이 거짓을 말하는데 자기자신도 그것이 거짓임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내용이 참이 아닌데 그 자신은 그것을 참이라고 굳게 믿고 말하는 경우다.
또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기나, 조종에 휘말려 자신도 그것이 거짓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 이와 같이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경우를 놓고
부처님의 말씀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가를 검토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본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관찰하지 못하는 내용들을 모두 나열하고 이런 검토를 행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후세계나 윤회와 관련된 내용, 수행방안과 결과의 관계들을 놓고 이런 검토를 행해 볼 수 있다.
과연 거짓을 말한 것인가? 거짓을 말했다면 무슨 이유로 무엇을 목적으로 한 것인가?
만일 그 내용이 교묘하게 사람을 속여서
그 결과로 다른 이가 이익을 얻거나 하는 관계라면,
우선 그것을 통한 누군가 이익을 얻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윤회나 사후 상태에 관한 불교의 내용은 이 관계에 들어맞지 않게 된다.
□ 우선 사후상태가 없다면, 사후상태에 대해 행한 거짓은 그로 인해 얻을 이익이나 그 이익을 얻을 이마저도 사후에는
없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것이 거짓이라면, 사후에 무슨 다른 목적을 이루거나 이익을 얻을 바탕이 아예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짓을 행한 이에게도 역시 사후에는 무익하거나, 필요없는 거짓이 된다.
예를 들어 사후상태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어서 사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그런데도 지옥이 어떠어떠하고 하늘의 수명은 반대로 몇십억년이고 지극히 편하고 좋다..등으로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어차피 말한 사후상태나 윤회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위와 같은 설법을 통해 사후에 사후세계에서 큰 이익을 얻지도 못한다.
따라서 그런 이유로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사후상태나 윤회가 없는데도, 그것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는 경우는,
그 거짓으로 생전에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인 경우라고 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거짓을 말한 이나 속은 이나 모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계도 여기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즉 생전에 부처님이 그런 말을 통해 커다란 부당이익을 거둔 관계는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이제 사후상태나 윤회관계가 정말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거짓은 상대를 사후에 하늘 또는 반대로 지옥으로 이끌어 들어가게 하고,
그로 인해 그 거짓을 말한 이가 어떤 이익을 얻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또 이와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비록 부처님이 사후상태나 윤회관계를 말하고 하늘이나 지옥의 여러 상태를 말하지만,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은 그런 하늘이나 지옥을 향해 가지 말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고의로 위와 같은 내용을 거짓으로 말할 이유나 동기가 있다고 보기 힘들게 된다.
만일 하늘이나 지옥에 관한 설법 내용이
그런 좋은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제시하기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그렇게 되려면, 나에게 지금 전 재산을 바치고 따라야 한다 등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라면
고의로 사람을 속여서 지금 현세에서 당장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게 된다.
또 그것도 아니라면 사후세계에서 다른 이익을 얻기 위하여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는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목표와 방안은 위와 같은 내용을 향하지 않고 그와 직접 관계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하늘이 그렇게 좋다해도 도달할 수행목표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고
오히려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위와 같은 하늘의 영화나 지옥의 고통들과 윤회의 내용들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 또 한편 이와는 다른 사기성 목적에 의한 거짓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가령 사악한 목적으로, 상대가 좋은 상태를 얻는 것을 방해하고자
교묘한 거짓말이나 복잡한 이론을 제시하며 거짓말을 행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르면
상대가 교묘하게 이끌려 들어가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다.
현실에서 사기범들이 행하는 수법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많은 사기꾼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우선 믿게 하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계속 제시해주어 신뢰를 쌓고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딱 한번 속여
치명적인 피해를 상대에게 주고 떠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처님이 행한 설법이 위와 같은 경우라고 가정을 해보자.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윤회나 사후상태가 전제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그 내용은 쓸모없는 거짓말이 된다.
사후에 다른 상태가 없다면, 그에 관해 거짓을 말하여 속이는 데 성공하거나, 못하거나,
최종적으로 아무런 차이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사후세계만은 정말 있는데,
단지 거짓내용을 말해서 일부러 괴로움에 빠뜨리려는 목적이라고 가정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로 생각하기도 힘들다.
우선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그런 윤회를 통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여러 거짓의 가능성을 살펴볼 때
부처님의 경우는 이런 경우들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만나게 된다.
한마디로 사후상태나 윤회관계 그리고 인과관계에 관련하여 가르치는 내용이
그를 통해 사후에 그런 윤회의 어떤 상태에 이끌어 들이기 위함이라면,
그런 목적을 위해 행하는 거짓이라고 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제시하는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별도의 상태를 추구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짓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불교는 윤회나 사후상태를 제시하지만
그 안에서의 어떤 내용을 목표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윤회를 끊고 부처의 상태나 열반의 상태를 목표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처럼 부처나 열반의 상태를 목표로 제시하지만,
또 한편 그런 내용은 끝내 실재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그러기 때문에 집착을 떠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지만,
그 수행은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과 분별을 떠나 행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삼아' 수행해야
오히려 그 목표상태에 도달할 수 있고 얻을 수 있으며,
그럴 때 공덕과 복덕을 무량하게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베푼다. (K.1(1-4), T.220(5-7)
실재는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 하면 '얻을 수 있다'는
이런 내용부터가 사실 약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기는 하다.
사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내용은 전혀 이해하기 힘든 엉뚱한 내용이 된다.
우선 일반인들은 죽고 난 후는 모두 끝이며 사후세계는 없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그런 사후세계와 윤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표는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그런 윤회를 끊고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열반이란 것이 죽은 후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은 일반인이 처음 윤회나 사후세계는 본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사후의 상태로 상상하게 되는 내용과 얼핏보아 비슷하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본래 윤회 자체가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보기에,
윤회는 본래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사후세계나 윤회가 있는 것이며,
윤회과정을 통해 생명이 끝없이 윤회의 고통을 받게 되므로,
그런 윤회를 노력해 끊고 벗어나고 열반에 이를 것을 목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반의 상태는 죽으면 누구나 당연히 얻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힘든 수행을 통해 번뇌를 끊고 선을 닦고 깨달음을 얻어야만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그런 목표상태로서 열반이나 열반에 이르는 부처의 '실재내용'은 역시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에서 목표로 하는 내용들의 실재내용은 역시 얻을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해 분별과 집착을 떠나, '얻을 것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을 계속하면
그 목표 상태를 얻을 수 있고 그 복덕이 무한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사실 쉽게 이해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가르침의 본질적 내용 자체가 이와 같기에,
이 내용들이 상대에게 거짓으로 이끌고 그래서 어떤 상태인가 도달하고 얻게 만들기 위하여
거짓을 행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힘들게 되는 것이다.
▽ 이외에도 위와 같은 여러 내용이 거짓일 또 다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자신도 잘못 알고, 그런 끝에 결과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이른바 자신도 거짓인지 모르고 선의로 거짓을 말하는 경우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그 말을 행한 자의 동기나 이익 여부를 가지고 거짓가능성을 추리해 판단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정말 순수하게 이런 내용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선택 문제만 남게 된다.
그래서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참거짓 판단 문제는
여전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가장 기본적으로
부처님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지 말고,
수행자 자기자신이 스스로를 믿고 진리에 의지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들의 참 거짓 판단 문제는
자신의 진리 판단 문제에 속하는 것이며,
부처님에 의한 속임과 그렇지 않음의 문제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내용에 대해 참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물론 어렵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그냥 믿고 따를 것인가가 문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원칙적인 문제의 성격은 위와 같다는 의미다.
□ 이런 경우 결국 참거짓판단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실용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면 결론을 쉽게 얻을 수도 있다.
즉 과학적인 관찰로 참 거짓 판단에 한계가 있는 경우,
이런 내용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믿는 것이 유리한가 불리한가의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 그래서 일단 사후상태나 윤회도 없고 또 그에 관련한 인과관계의 내용도 모두 거짓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다시 반대로 그것이 사실인 경우도 각기 가정한다.
이렇게 여러 경우를 가정하고, 각각의 판단에 따른 결과 차이를 비교해본다.
그리고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실 이 각 경우마다 서로 모순되고 차이있는 결과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는 그 선택에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즉 이 말이 거짓이라고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마다,
각 선택이 큰 차이있는 결과를 만든다면
이 선택은 매우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적어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설령,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나 사후상태, 그리고 이에 걸친 인과문제 등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 가르침은 최소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에 있어서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하다.
그러나 정말 사실이라면 당연히 더욱 유익하다..
그와 같은 결론을 만나기 때문이다.
□ 사실 이런 식의 설명이 앞으로 살필 인과관계 문제의 참거짓을 밝히는 데 큰 증명의 힘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과에 관련된 이론은 복잡하지만,
그 이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할 내용과 방향이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머물러 행해야 할 내용은 보시와 제도라고 간단히 제시한다.
다른 경전을 살펴도 마찬가지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 노력하고
선한 서원을 세우고 실천한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
등등으로 제시된다.
이런 여러 수행방안은 현실에서도 유익하다.
그리고 설령 그 내용이 거짓에 바탕을 두어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믿고 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우선 그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러 믿기 힘든 내용의
진리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사실 이런 여러 판단 문제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정확한 방법은
그 내용에 대해 직접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고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원칙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직접 하늘도 구경하고 지옥도 구경하면서,,
그리고 어떤 경우는 어떤 행위를 하여 지옥에 가는 것을 직접 관찰도 하고,,
그런 가운데 참 거짓을 판단할 힘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에 더 정진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력을 직접 얻은 후,
그런 내용들에 참거짓을 직접 판단할 능력을 갖고
직접 확인하며 판단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좋을 수 있다.
■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상태로 사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상태의 대부분에게는 여전히 이들이 의문 또는 의심의 문제로 남게 된다.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위와 같다는 의미이다.
직접적인 관찰과 검증이 가능하지 않는 단계에서는
보조적으로 위와 같은 의문과 의심을 제기하고 검토하여,
자신이 당장은 믿기 힘든 부처님의 말씀들에 대해
신해[信解-믿고 이해해 받아들이는 상태]를 일으킬 계기가 마련되고
더 나아가 그런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계기로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고 보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부분에서
불교를 신앙, 믿음으로서 받아들여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지게 된다고 본다.
////
● 연기론에 대하여 공부내용을 적어 보기 전에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사실 그 내용이 생사에 걸친 내용이어서 구체적 내용의 근거를 파악하기 힘든 경우도 많고,
또 그 이론적 내용이 매우 복잡하기도 하고, 또한 어려움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인과관계 및 원인-결과의 내용과 관련해서
살펴 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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