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비관이란 앞에서 본 것처럼 악이나 나쁜 것을 대해 성이 날 때,
그 독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 악과 나쁨을 상대하여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게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악이나 나쁨을 행할 때,
자신이 그 상대를 대해 자비의 마음을 갖는다면,
자신과 상대가 모두 최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즉, 자신이 상대의 악을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상대를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 올리려 노력하면,
상대도 또한 자신도 그와 같이 최상의 상태로 될 수 있다.
● 자비관으로 대하지 않을 때의 결과
그러나 악이나 나쁨을 대할 때 자비로 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경우 자신도 또한 상대도 모두 함께 지옥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군가 자신에게 악을 행하고 나쁘게 대할 때,
이에 대해 누구나 분노를 일으키기가 쉽지,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만큼 더 더욱 자비관을 부단히 수행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특히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관용과 용서의 마음으로 너그럽게 대하던 이들도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는 대상에 침해가 일어나면 갑자기 불같은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대목은 바로 여기서부터이다.
부처님은 최극단의 상태까지 이 자비관을 수행해야 함을 목표로 제시한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생명, 신체, 재물, 가족. ....등등에 애착을 두고 산다
그런데 어디까지 이 자비관의 수행이 도달해야 하는가하면,
바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침해되고 훼손되는 경우까지
위와 같은 자비관의 자세를 유지할 것을 수행목표로 하는 것이다.
석존은 참는 인욕수행을 하던 중
왕에게 붙잡혀 자신의 신체를 칼로 잘라내는 형을 당하는 순간에서도 상대에게 원한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말한다.
석존의 전생이야기지만, 상대가 별 이유도 없이, 석존이 참는 수행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왕에게 붙잡혀 억울하게 자신의 신체를 잘라낼 때, 그처럼 참고 화를 내지 않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사실 누구에게나 매우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수행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현실에서는, 악과 나쁨을 행하는 이가 분명 상대이고 그의 잘못인데,
왜 오히려 자신이 이를 참고 상대를 자비로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해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비보다는, 그 악과 나쁨을 행한 이를 상대로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악과 나쁨을 행해
통쾌하게 복수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 그러나 어렵다 하더라도, 악이나 나쁨을 행하는 이를 자비로 대하는 수행을 행하지 않으면,
그 결과로 서로가 모두 끔직한 지옥의 상태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현실의 분노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상대의 악행에 화를 내고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는 경우 그 자신부터 걷잡을 수 없는 불쾌와 고통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미움을 기초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고
또 상대가 다시 자신에게 그것을 이유로 해를 가하고
그렇게 서로 가해를 주고 받으면서 자신과 상대는 지옥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악과 나쁨에 대해 자비관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앞과 같은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 자비관을 수행하려 할 때, 직접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물 가족,,등 에 대한 침해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 때부터 수행을 시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선은 상상을 통해 자신에게 부당하고 억울한 침해가 일어난 상태를 상상하고 이에 대해 참고 자비로써 대하는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온갖 범죄를 상상하면서 그런 범죄에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 억울하고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 자신을 놓고, 그 상황에서 화를 참는 수행을 시작한다. [인욕]
다시 그 상황에서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 가해자를 상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그 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방안은 이미 앞 글에서 본 여러 가지 방안들을 생각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현실 사건을 놓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 mun님과 lab님이 최근 중학생 자살 사건 이래 학교 폭력이 많이 문제되어서
이에 대해 살피고 있는데 기사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노가 일어난다고 한다.
최근에는 또 다른 기사가 나왔다면서 분노를 일으킨다.
내용인즉 아주 힘센 학생이 반장이 된 후 반 친구들을 의자에 묶어 놓고 대걸레로 난타했다는 것이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평소 성적이 좋은 B군에게 학력고사 예상문제를 뽑아오라고 시켰는데 잘못 알려줘서 점수가 나쁘게 나왔다는 게 발단이었다. 간간이 B군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유군은 어느 날 자율학습시간에 B군 등 3명을 의자에 결박해 놓고 허벅지 등을 마구 때렸다. 폭력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낸 것이었다. 지난해 9월 보다못한 한 학생이 담임교사에게 문자메시지로 폭행 사실을 전했지만 그뿐이었다. “반장으로서 모범을 보이라”는 훈계를 듣고 화가 난 유군이 오히려 교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B군을 복도로 끌고 가 걸레자루로 마구 폭행한 것이다. ‘밀고자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이유였다....."
기사출처: 반장의 학생 폭행사건: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20106004032&ctg1=01&ctg2=&subctg1=01&subctg2=&cid=0101080100000
또 다른 사건도 비슷하다.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려 전국 여기저기에서 학생들이 자살을 한다.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http://boom.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1223050020
대전 여고생 자살사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22/2011122201556.html
광주 중학생 자살, 여주 학생사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103009017
피해자가 가해자되고 가해자도 피해자였음: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06/2012010600043.html
그런데 그 자살에 이르도록 괴롭힌 친구들은 반성없이 서로 휴대폰으로 이 자살사건에 대해 장난스레 문자를 주고 받고,,또 학부모들은 학부모들대로 자신의 자식들을 감싸며, 제대로 피해학생의 부모에게 사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기사 내용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lab님 같은 경우는 학생들이 자살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관심을 보인다.
즉,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의 고통이 자살에 이를 정도가 되지 않으면 이런 수많은 피해가 있어도 사실 대부분 관심을 갖지 않고 그래서 묻히고 만다.
반대로 말하면 피해를 받는 학생들이 자살을 하던지, 아니면 피해학생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나서 칼이나 총을 들고 상대학생을 사살하던지 해야 비로소 이런 문제가 조금 세상의 관심을 받고 시정되는 면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례와 비슷하게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이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을 흉기로 살해한 학생이 정당방위로 무죄가 된 미국사건의 사례를 보면서 말을 하는 것인데, 물론 이는 미국 고등학교의 사례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을 자구 괴롭히는 학생을 한 학생이 회칼로 찌른 사건이 있기는 했다.
미고등학생의 다른 학생 살해사건: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005716934&code=41131111&cp=nv1
○ 사실 이런 사건에서는 학교에서 가해학생을 더 심한 폭행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선생님들이 문제가 일어날 처음 상황에서 문제학생들을 상대로 그렇게 폭행으로 다스리지 못하여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학생들의 인권을 너무 보장해주다보니 오히려, 학생들간의 폭행문제가 양산되고 시정되지 않고 있다는 시각이다.
그런데 학생들간의 폭행을 이제 선생님의 폭행으로 대체해 넣으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또 선생님이나 학교나 사회가 그렇게 문제를 바로잡고 해결해 주지 못하면,
이제 모든 각 학생이 각각 자신의 가방안에 칼이나 몽둥이 심지어 총기까지 넣어 다니면서
힘이 약한 이들도 이런 무기를 통해 각기 평등하게 자신의 신체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친구가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기 시작하면
참지 말고 곧바로 상대에게 다가가 그 등을 칼이나 몽둥이를 들어 가격하고 보복하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사실 딱히 답이 없다.
빈번히 발생하는 이런 문제마다 모두 부모나 어른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게 하지 말고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면서 참으라고 말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폭력학생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맞대응하면서 자구책을 구하라고 하기도 그렇고,
서로 조직을 형성하여 대립하여 폭행을 행사하면 다시 조직을 만들어 맞대응하라고 할 수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회의 문제를 다 이렇게 서로 싸움을 통하여 해결하라고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방책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결국 우리가 악행에 분노를 일으켜 반응하거나 기대하는 내용의 체계는 비슷하다.
누군가 악행을 행하면
그를 상대로 악행으로 응징하고 보복해야 통쾌함을 느끼고 또
그로 인해 상대의 악행이 줄어들거나 예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과 같은 사건들에 대한 반응이나 대책도 사실은 그 연장선에 있다.
즉 가해학생을 체포해 다시 가해를 가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가만히 보면 위 기사에서 가해 학생도 처음 그 나름 화가 나서 피해학생을 구타를 가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원래 최초에 자신이 부당한 가해를 가하기 시작했겠지만,
그러나 피해학생측에서 처음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다시 그 학생이 이에 분노를 일으켜서 더 심하게 가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분노와 저 분노가 사실은 서로 원인 결과의 관계로 서로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분노와 보복이 행해져 그것이 끝나고 정리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는 관계에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폭행 문제를 학교 선생님이나 사회의 다른 어른들의 폭행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사실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악화다.
마치 처음 시체가 하나 생길 때, 이것을 이유로 그 위에 다른 시체를 다시 무수히 쌓아 놓고 처음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문기사를 통해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구속되고 처벌받는 대목까지 본다.
그러나 사실은 이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의 씨가 되고 다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묻혀 있게 된다.
우리는 신문을 덮고 이 사건들을 잊게 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이 사건이 그렇게 묻히고 덮이지 않는다. 그의 가슴 속에 각기 깊은 불쾌와 원한의 상처로 묻히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 반성과 참회는 없고 대부분 서로가 서로에 대해 깊게 간직하는 원한이 되어 남는다.
불교에서는 세세 생생 보복과 피해를 서로 주고받는 악한 관계를 말하는 데 그것이 바로 이런 상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처음 분노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를 자비관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서로가 세세생생 지옥에 들어가 고통받게 된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태의 무한한 연속과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런 작은 원한과 분노의 증폭 현상이 사실 바로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와 관련된다.
사실 비슷한 사례는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군대에서의 폭행도 그렇고 기타 등등의 대부분의 사건 기사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 무엇이 최초에 잘못인가.
개인 각각이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에 부딪힐 때, 그에 대해 올바른 반응을 행하지 못한다는 문제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나치의 유태인 대량 학살과 같은 인류의 비극적인 사건도 사실은 이런 연장선에 놓여 있다.
오늘 신문기사를 보면 소떼를 공격했다고 이웃주민을 3천명 학살한 사건이 기사로 나오고 있다.
3천명학살사건 : http://www.koreaherald.com/national/Detail.jsp?newsMLId=20120106000834
이 사건도 결국 앞과 같은 내용의 연장선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비참한 사건들, 예를 들어 르완다 학살이나, 크메르에서의 학살 사건, 유고내전 등 최근에 벌어진 대량 학살 사건 들을 비롯하여, 그 외 인류가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수많은 전쟁 등등도 사실은 모두 최초의 분노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함을 볼 수 있다.
● 그래서 다른 이의 악행이 있고 이로 인해 자신이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자신이 생각해야 할 첫 문제가 있다.
상대가 악하다고 하여 자신도 이에 이끌려 들어갈 것인가.
그래서 상대에게 보복을 가해 악을 행하는 악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그것도 힘들고 또 참기도 힘들므로, 자신을 해치는 자살을 할 것인가.
● 그러나 상대가 자꾸 자신을 괴롭히고 악을 행하는데 그러면 보복공격도 아니고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자살도 아니라면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
결국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자비로 대하라는 것이다.
자비로 대하는 가운데 선하고 지혜롭고 교묘한 방편을 내어
상대와 자신을 모두 선하고 지혜롭고 행복한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 내는 것이 해결책이다.
○ 사실 현실에서는 신문기사내용처럼,
피해를 당한 후 자살을 행하거나, 보복공격을 해 성공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또 반대로 위와 같이 자비로 대하여 선교방편을 내어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도 매우 힘들고 쉽지 않다.
그러나 각기 다 어렵지만 각 방안을 따라,
그 결과에 결과를 죽 이어 따라가보면,
분노로 대응할 때는 그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일으켜
관련된 모든 이가 끝내 모두 지옥에 가 모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그 반대의 방향은 또 그 반대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어렵지만 결론은 자비관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비록 어렵더라도,
앞과 같은 사례들을 참조하여
억울하고 억울한 사건의 당사자가 자신이 직접되어,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물, 명예,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이나 신체, 재물, 명예,,,,등등이 침해되고 훼손되는
그런 상황에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참고 견디고 다시 자비로 상대해
상대와 자신이 함께 그 곳을 벗어나오는 마음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 수행이 되지 않고 마음 훈련을 통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악마가 당신을 불시에 방문해
당신이 집착하는 그 어느 하나만이라도 부당하게 침해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곧바로 악마가 파 놓은 덫에
그대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로 인해 지옥에 빠지고 이후 그렇게 지옥에 빠져 지내는 자신을
그로써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나 실제로 행하기 힘들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를 대비해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부단히 자비관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WEB: http://blog.paran.com/buddhism007/4646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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