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 ● 물리적 문제의 해결과 불교 |
● 물리적 문제의 해결과 불교
본래 없는 영원불변한 실체,
또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참된 실재의 모습,
이런 것을 붙잡고 평생을 논의한다해도 실익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대하는 현상들은 모두 참된 실재가 아닌데도 이것을 실재라고 여기고 여기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이유는 그것이 좋다거나 싫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진짜라고 여기며 집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 진리가 중요한가.
참된 실재가 아닌 것은 참된 실재가 아니라고 놓고,
얻어진 내용은 실재가 아니지만 정말 있는 것처럼 꿈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라고 바로 알고
그리고 그런 가운데 좋음 나쁨이 물거품처럼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바탕에서
모두에게 오래 오래 좋음을 주는 상태를 집착없이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라 놓고 그것에 집착하여 고집을 풀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좋음을 실현하려 하고
그런 끝에 서로 요구하는 내용들이 물리적 한계에 부딛혀 끝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lab님이 찍어온 하나의 사진을 보면,
이 하나의 사진을 볼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구획하는 관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이고 나무는 나무고 풀은 풀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진 안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구분해 관념한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 행하는 정상적인 인식이라고 함은 그런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동일한 사진을 놓고, 세모 네모 원을 마음대로 마음속에서 그려 놓고
여기서 세모 네모 원을 찾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세모에는 나무의 일부와 사람의 일부 풀의 일부가 잘려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관념들이 부당한 것은 또한 아니다.
그리고 처음 관념과 두번째 관념을 가질 때,
하나의 사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에서는 또 이 둘 사이의 내용이 달라진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진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고 사진을 바라보면
그 고집으로 인해 하나의 사진이 갖고 있는 다른 나머지 세계들을 모두 보지 못한다.
이미 오래 되었지만 lab님에게 문제를 내어 본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라 문제를 낸 본인마저도 가물가물해서 그 문제 내용이 어디 있나 찾아 보았는데, 이글 댓글안에 있다.
http://blog.paran.com/story007/47289204
일단 참조를 위해서 전제하면 그 때 낸 문제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마 그 당시 PGA 골프 투워에서 한국선수가 우승을 하는가 못하는가가가 걸린 경기가 열린다는 뉴스를
보고 그 글을 올린 것으로 생각이 나지만 여하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lab님께서...
보통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심심해 하시는 경향이 있으므로..제가 다시 하나 lab님에게 해결할 문제를 선사하고자 합니다.
아침 뉴스를 보다 보니, 공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 같습니다.
공을 혼자만 갖고 놀려는 경우도 있고
공을 주기만 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공을 받기만 하려는 경우도 있고
공을 주고 다시 안 받으려고 애쓰는 경우도 있고,
공을 주고 상대가 안 돌려주거나 못 돌려주거나 잘못 돌려주면 환호하기도 하고,
공을 다른 공안에 집어 넣으면 매우 좋아서 환호하는 경우도 있고
여하튼 이 공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다들 각종 애환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공은 많은 재미와 함께 슬픔도 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다른사람이 매우 심각한 공의 문제를 바라보면
자신은 그것을 너무나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만,
그러나 자신이 심각하게 여기는 공문제도 또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필요한 것이진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 공문제와 관련하여
제가 물리적 한계에 서로 부딪해서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물리적 공 문제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1 우선 일렬로 쌓아 올려 놓기 힘든 크기가 다른 공 3개를 죽 포개어 올려 놓아보십시오 ( 배당 점수 0.5점)
1 서로 한 공간에서 다른 공 안에 서로 들어가지지 않는 공 3개를 하나의 공안에 모두 원만히 넣어 보십시요.( 배당 점수 0.5점)
1 응용문제는 이후 공들이 무한히 각기 따로 있을 때 위 방식을 응용하여 이들 무한한 공들을 서로 원만히 위치하여 오래오래 유지될 수 있게 할 방안을 논술하시오 ( 배당점수: 99 점)
만점 획득시 상품은 공입니다..
잘못 푼 경우는, 앞에서 나열한 공의 애환들을 재미있게 점수따라 누리십시오...~~
"
이처럼, 제가 lab님에게 문제를 내기는 했지만, 제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잘 알기에 낸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서 문제되고 한계가 나타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거나 고민하게 되는 여러 물리적 상황을 생각해보고
아마 이런 물리적 상황을 상징할 수 있는 문제상황은 대강 위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그 한계를 돌파하여 해결할 방안이 정말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하는 그런 생각에서 내 본 문제입니다.
그것은 불교를 연구하는 본인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 기타 일반적 현상에 관한 진리와 관련해 연구를 하는 분들에게서도
결국 같은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에
공통적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낸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lab님의 문제는 여러가지였는데
우선 그 중 하나는 제 부탁때문에 시작된 고민이기는 하지만,
옥상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옥상에 있는 수많은 화분과 흙들에서 어떻게 생명들만 빼내 다른 곳에 안전하게 이주시키는가라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세상의 기본 재료나 소재는 변화 과정 전후에 모습을 달라지지만 그 기본 재료자체는 전후로 무한히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변화는 무한히 열려 진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무한한 시간과 변화 속에서,
어떻게 무한한 마이너스의 가치들을 만들어 내지 않고 반대로 무한한 플러스의 선과 지혜, 행복 등의 가치를 무한히 증식해 낼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 문제를 물리적 재료나 환경과 관련시켜 이해하면, 결국 하나의 미미한 티끌에서 어떻게 무한한 플러스를 만들고 이것을 각 티끌에서 무한히 적용시킬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됩니다.
또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서로 다른 희망이 동시에 충족되기 힘든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 이를 어떻게 돌파하여 해결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mun님의 약간 공상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환경을 심하게 파괴 시키지 않고 기존 환경을 되도록 유지하는 가운데,
개발이나 발전이 가능한가 등의 문제도 이와 관련이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mun님이 평소하는 이야기 내용 가운데,
건축 건설 과정에서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막으려면
되도록 변화 전후의 물리적 상태에 서로 균형을 맞추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지하수도 자꾸 파내 쓰기만 하고 보충하지 않으면
지면이 붕괴되거나 바닷물이 유입되어 못쓰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같다고 하며,
매립이 필요하지만, 자꾸 매립만 하면,
온난화로 남북극 빙하가 녹는 현상과 함께 태평양의 섬들이 없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를 매립할 때는 매립한 양 만큼 바다나 육지 안에 우물도 파줘야 하고
이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우선 육지에서 부터 바다를 통과하는 해저터널을 파가면서 거기서 나온 흙에서는 광물도 채취해
비용도 마련하고, 또 그렇게 파낸 흙으로 매립을 하고
파낸 터넬을 통해 섬들과 다른 대륙을 이어 교통문제도 해결하고,
그 터넬 가운데 일부는 해저 관광시설도 만들고
또 터넬 일부는 매립한 만큼에 해당하는 우물로도 이용해야 한다.
그런 노력으로 실업도 막고 교통 환경도 개선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아무리 바다 밑으로 깊게 파나가도 공사과정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빨대를 컵에 꼽으면서 한쪽을 막아 보이며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여주더군요.
뜨거운 팥죽에 젓가락이나 빨대 꼽는 문제처럼 쉬운 문제라면 누가 걱정을 하겠습니까만, (^^)
mun님의 시리즈는 그외에도 많습니다.
육상에 건물을 지을 때도 자재를 계속 옮겨와 한 쪽으로만 쌓아 올리면
보트에서 한쪽으로만 사람이 몰릴 때처럼 판이 기울어져
기존 상태와 급격히 상황이 변화되어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건축자재가 다른 곳으로부터 쉼없이 옮겨져와 건축물들이 올라간 지점에서는
앞으로는 되도록 지하의 흙을 파서 지하건축을 하고 파낸 흙을 앞과 같은 방식으로 순환시켜
어떤 형태로든 그에 상당한 재료들이 원래 출발한 지점들로 되돌려 주는 방안을 생각해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 서울 같은 곳에서는 앞으로 지하 10층 50층 100층 등의 건물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처음에는 지하 10층 부터 시작해보고 그 이후 기술이 발전하면 차후 그 밑으로 계속 파내려가며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 합니다. (^^)
그런데 문제는 지하 생활을 지상과 차이없이 동일한 환경으로 만들어 주려면
빛과 공기 같은 것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래서 빛을 불필요한 부분에서 어떻게 쉽게 끌어당겨 이용할 수 있는가에 관한
두분 사이의 공상적 논의들이 이렇게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빛이 필요없는 공간에서 빛을 끌어 잡아 당겨 쉽게 사용하려면
광집적용 블랙홀 생성기가 필요하다고 하더니,
한 분이 그것은 쉬운데 그것보다 어려운 것은 점차 기술이 발전해 한국에서 남미쪽까지 파내려갈 때
우선 원이 둥글기 때문에 서로 각 지점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가면 상호간에 소유권 영역이 교차되어
분쟁이 발생해 이를 해결하기 어렵고
또 하나, 지하 건축과정에서는 맨틀층 이후부터는 삼각점 좌표를 찾아내기 어려워서
아르헨티나 쪽으로 파내려가다 브라질 쪽으로 나오기 쉽다고 그러더군요. (^^)
유쾌한 상상인데, 두분이 나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경전에서는
보살들이 모래알 수 만한 세계를 지나 우주상의 타국토의 부처님을 방문하여 법을 듣고 온다..는 등의 구절이 많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각 은하계를 그렇게 수없이 지나 방문하고 돌아오려면 한마디로 빛의 속도를 초월해서 원하는 좌표로 쉽게 이동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목표점과 출발점 사이에 블랙홀과 화이틀홀을 만들고 이 사이를 웜홀로 연결해서 바로 이동해야 한다는 등...이야기를 하시더니,
위 블랙홀 생성기를 통해 두 좌표사이를 그렇게 만들면 되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번 옥상 방수문제도 mun님이 철판을 우산처럼 옥상에 씌어 해결하자는 이상한 발상에서 시작된 것인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공법이 있어서
그렇게 철판을 씌워 방수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그전에 옥상에 있던 많은 화분과 흙들의 처리문제가 제기되고,
이를 그대로 철판 밑에 보온재역할을 하게 그냥 두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이후 물이 공급이 안되고 여름 등에 너무 뜨겁게 되어
생명이 살 수 없게 된다고 하여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게 되게끔
진전된 사정이 있기는 합니다.
여하튼 그 문제는 lab님이 나름 해결을 했다고 하며,
이제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원에서만 약간의 후속조치를 마저하면
상생공존의 방식으로 처리가 마무리되고
사후에 영혼 천도제로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군요, (^^)
환경보존이란, 꼭 기존환경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급격하게 환경이 변화하면 그에 대처할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
생존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환경도 보존해야되고 또 더 좋은 환경으로 개발도 해야 되고
사회 실업문제나 경제개발 성장 발전 문제도 해결해야 되는데,
이런 여러 고민차원에서 공상적 발상이 시작된 것 같은데
최근에는 mun님이 환경보호를 위해
씹은 껌을 그릇등에 잘 보존해서 나중에 필요한 때 되씹기 운동을 하면,
환경피해도 막을 수 있다고 하고,
lab님에게는 담배를 다 피고 피운 꽁초는 입담배나 코담배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라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귤 한 조각을 입안에 머금고 하루 반나절 동안 계속 귤 맛을 보았다거나,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커피 맛을 맛보면서 지냈다면서,
맛을 위한 기호식품들은 공통적으로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그럴 듯도 합니다만,
기호식품의 본 취지에 어긋나기에, 과연 그렇게 해서
맛을 보려는 분들이 계실지 의문입니다.
lab님은 한층 더 나아가
원 재료 상태를 오래 유지 보존하는 가운데,
그로부터 가치를 계속 얻는 방안도 좋지만,
각 재료가 필요한 곳에 빨리 빨리 순환시켜
가치를 증식시키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과거나 현재나 원 재료는 같은데
오늘날 한국이 과거에 비해 발전하였다고 하여, 어느 다른 나라가 그 만큼 궁핍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같은 기본 재료를 놓고 어느 때는 풍족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어느 때는 그렇지 못한 것은
결국 기존 재료를 어떻게 조합해 이용하는가 하는 지혜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선 각 재료가 최대의 가치를 발휘하도록 계속 배치를 바꿔 나가야 하며,
이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그 교환의 순환속도를 더욱 빨리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다지 효용이 없는 껌을 나중에 되씹기 위해서
냉장고안에 넣어 둔다는 등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하며
그보다는 연인들끼리 씹은 껌을 서로 돌려 주어 씹게 하여
효용을 증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를 통한 약간의 세균 전파는
상호간에 면역력도 공유하는 결과를 낳아 오히려 좋다고 주장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남의 껌을 씹는 것이 꺼림직하게 되는 경우는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늘 그 반대의 경우가 있는 법이니,
바로 그런 경우를 찾아내 그렇게 이용해 나가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다..이러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속옷 하나만 예로 들어도
세탁과 환경 오염 이런 문제로 고민하여
한 번 입은 속옷을 최장기로 입으려 노력하지 말고,
차라리 더러운 속옷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쪽으로 옮겨 놓고
자신은 또 반대로 깨끗한 속옷만 계속 내놓는 쪽을 찾아가 바꿔 입는 것이
자신이 무한히 깨끗한 속옷을 입는 방안이고
또 그것이 상호간 가치를 무한히 계속 증식 유지시켜나가는 아주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합니다.
속옷 이야기에 들어가면 좀 심한 이야기지만,
결국 내용은 폐품 재활용을 비롯하여
모든 가치있는 상품의 생산 소비 재 생산의 무한 순환과정이
그런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핵심은 어떤 물질이 쓰레기인가 예술품인가에 대해
각자의 고집 가운데 어느 쪽이 맞고 틀린가를 끝없이 문제삼아 피곤해하지 말고
그런 문제를 떠나,
단순히 어떤 것을 쓰레기라고 보는 쪽에서 최고의 예술품으로 보는 쪽으로
그 재료들을 옮겨 놓음으로써 이 둘 간의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이 변화과정에서 늘고 줆의 변동이 없는 같은 기본 재료의 바탕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가치를 계속 증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이런 가치의 증식 행위를 권장할 뿐만 아니라, 가속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일한 재료, 그리고 하나의 티끌에서 무한한 마이너스가 아닌
무한한 플러스를 증식해내는 방안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사실 왜 오늘을 살아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치있고 좋은 상태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늘고 줆의 변동이 없는 기본 재료를 놓고
가치만 무한하게 계속 증대되어 나갈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굳이 lab님과 mun님에게만 문제되는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놓여진 상황은
자신은 귀중한 가치를 갖는 재화를 소비를 통해 쓰레기로 만들어 끊임없이 밖에 내버리는 동시에,
그 대신 계속 밖에서는 귀금속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을 무한히 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불가능해보이는 이 문제가
서로 가치판단을 달리하는 다른 생명들이 모여사는 사회 속에서는
무한히 가능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의 똥을 맛있는 음식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말똥구리같은 생명체는
무한한 가치 증식과 순환을 가능케하는 생명 사회의 당당한 한 일원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 눈에는 당장 해충으로 또는 혐오 생명체로 보이는 무수한 다른 생명들이
다 그런 무한한 순환관계에 있는 것이다.
짧게 딱 1, 2 장면만 보면 그것들이 혐오스럽게 여겨지고,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 계속 이어 서로를 관련시켜 살피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문제되는 1, 2 장면에서는 그 상태를 지혜로운 다른 방안으로 돌파하면,
결국 서로가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무한한 가치 증식을 서로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방안이 된다.
아무리 혐오스럽다지만,
자신이 매일 만들어 내는 오줌 똥을 먹거나 청소해줄만큼 자신을 사랑해주는 연인을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이것을 서로 매일 배출하는 연인들끼리만 서로 붙어서 어떻게 앞으로 무한히 살아가려고 하는가.
그런 주장이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이 바퀴벌레와 껴안고 살으라는 주장은 아니지 않는가.
단지 각 생명에게 가장 가치있는 상태를 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가장 깨끗하고 가치있는 상태를 실현시켜나가고
그래서 자신 뿐만 아니라 전체 생명, 그리고 사회가 모두 무한히 가치를 증대시켜
자신도 최상이 되고 남도 모두 최상이 되는 방안이 있음을 말하는 것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앉아서 듣다보면 여러가지 유쾌한 소재이고 이야기이고,
비록 공상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름 오래 듣다보면 설득력도 있고,
그럴듯 합니다만......
여하튼 그런 가운데 최근 제가 물리적 문제까지 내보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생활을 하는 가운데 부딛히게 되는 물리적 한계를 돌파하려고 할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첫 문제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0.5점씩 1점을 배당했는데,
여행차 내려가시는 기차안에서 오색오징어와 알루미늄 캔 비어로 연구를 진행한 끝에 해법을 알아냈다면서
알루미늄 캔 비어가 답이고 오색오징어는 결과물이라고 하시더군요,
나중에는 블랙홀 생성기가 그 과정에서 필요한데,
이것을 완성하려면, 그 수단으로 스크류바와 바이 닐이 함께 필요하다는 등의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물으니,
산을 올라갈 때 빙둘러 올라가는 것이 쉽듯,
물리적으로 한 좌표에 많은 것을 놓으려면 비틀어야 한다는 군요(^^)
심지어 최근 나로호가 계속 실패하고 있는데,
그것은 산 정상을 암벽타기식으로 수직으로만 반듯이 올라가려고 자꾸 고집해서 힘든 것 뿐이니,
앞으로도 계속 실패하면,
자신이 직접 나사 방향으로 계속 걸어 목표점에 올라가서 올려 놓고
내려올 때는 케이블선을 하나 끌고 내려와 앞으로는 그 것을 이용하게 만들어 놓던지,
아니면 매번 비행기로 나사 방향으로 올라가 내려 놓던지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심지어 미국 Nasa라는 곳의 이름에 담고 있는 의미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군요
우주에서는 거북선 모양도 기차 모양도 다 운행이 가능하고
어릴 때 본 것처럼 자신이 그런 기차나 거북선을 타고 항성 여행을 떠나려면
빨리들 좀 만들어 놔야 하는데 너무 굼뜨다고 하는군요.
...(^^)
그리고 최근에는 핵무기로 요즘 한국사람이 많이들 걱정하는데
그 문제도 사정이 같다.
핵무기란 사실 비유하면 원시사회에서 다른 부족이 가진 불이나 오늘날의 라이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라이터를 가게마다 오늘은 팔듯
장차 핵연료도 가게마다 부탄가스처럼 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오늘날도 여전히 아이들이 라이터 장난을 하면 위험하고
부탄가스를 청소년들이 흡입하면서 담배까지 펴대면 치명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위험한 것은 무엇이던지 켤줄만 알고 끌 줄을 모를 때이다.
즉 문제는 그 재료자체라기 보다는
그 각각을 필요할 때 어떻게 켜고 필요할 때 또 어떻게 끄는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각 대상을 대할 때인데,
사자가 위험한 동물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상황따라 서커스에서 돈버는데 이용하지도 않는가.
결국, 자동차 운전에서 가는 방법만 알고 멈추거나
길 막히면 방향을 자유로 돌려 가는 방법을 모를 때처럼
어떤 이가 운전교습을 받다가 페달 하나만 밟아 출발시킬 줄 아는 사람이
데이트를 즐기려 집 자동차 끌고 애인과 친구 태우고 뛰쳐나가 나갈 때가 위험한 것이다.
핵무기를 놓고 지금 당장의 전쟁이나 무기의 차원에서만 집중해서 이야기한다면,
적이 가진 무기는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적지에 투하해 놓은 폭탄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원하는 지점이 아니면 폭파시키고 싶은 지점에 놓고 폭파시키면 우리 핵무기다. (^^)
물론 상대가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가.
그리고 그런 사정은 우리만 그렇고 상대는 안그런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전쟁이란 결국 비유하면
공을 주고받으면서 한쪽이 죽어 없어질 때까지 시합하자는 것과 같은데,
상대 공을 못 막고 자신의 공을 못 넣으면 지고 죽는 것이어서 위험한 것이고
또 막상 시합을 하면 자신의 예상과 달리, 자신만 늘 이긴다는 보장을 못하고
한번 지면 완전히 끝장난 상태로 되어 위험천만한 것이기에
깊은 걱정을 하고 살펴야 할 문제인 것이기는 하지만,
걱정의 포인트가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상황을 전제로 놓고
그 과정에서 상대가 세계 공인구를 쓰는가 표준 라켓을 쓰는가가 문제라고 하기 보다는
정 그런 상황이라면, 상대가 들고 다니는 비표준 라켓을 어떻게 뺏어 상대 뺨을 때릴 것인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원래 불은 물로 끄는 것이며 잘 안 꺼지면 불을 불로 끌 수도 있는 것이고
시끄러운 소리도 귀를 막아 조용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반대파장의 소리를 내어 중화시키기도 하는데
모든 원리가 비슷하여서,
남이 불을 켜건 소리를 지르건
문제는 자신이 원할 때 켜고 원할 때 끄는 방안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생활에서도 집중하면 집중으로 인한 병폐가 나타나고
산만하면 산만함으로 인한 병폐가 나타나는데,
집중하면 집중하지 않는 나머지가 다 빈 틈이 되고
산만하면 산만한 것들이 다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 이 각 병폐를 없애려면, 산만한 동시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그러나 가능하더라도 무엇때문에 그렇게 하는가를
스스로 잘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 문제는 그것보다는
게임을 하는 최종 목적
그리고 그와 함께 화학무기나 세균무기 등등..
그리고 자신 자체가 암이나 세균인 사람들의 총체적 삶자체가 문제인데,
그러나 그것도 종합적으로 큰 걱정은 아니라고 합니다.
걱정이 그것이 아니라 일단 전쟁을 하면
아르헨티나까지 세계를 바늘 하나만 가지고 빙 돌아 다 점령하고 난 다음
정작 그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고민인 분이라서 (^^)
태평하신 것 같은데,
최근 결론이
다 점령하고 난 다음에 할 일은
결국 점령지에서 포로들 붙잡아
자원 채굴하고 일시켜 좋은 상품들을 만들게 하는 일인데,
오래 점령상태를 유지하려면 되도록 그것을 즐겁게 잘 쉼업이 끝없이 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한 다음에는
자기는 자기나름대로 카메라 들고 여기저기 즐겁게 관광다니고 사진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다..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최근 해변에서 쭈꾸미 하나를 선물받고
추구미 작전은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작전지시를 받고 돌아왔다고
중얼중얼하시는데,
여하튼 모든 문제는
아마 앞과 같은 원리에 의해
Go stop turn pass quick quick slow slow
이런 사교댄스의 기본 매너와 함께 댄스의 목적 자체를 잘 모르고 춤을 추는 것이 문제이고,
설령 파트너가 그렇다해도 그런대로 자동 정화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한심태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하튼 이야기차원에서야 모든 이야기가 다 그럴듯 하지만,
그러나 누가 그런 이야기를 몰라서 사람들이 걱정을 한답니까..
과연 정말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좋은 방향으로 모두 실현 가능할 지가 관심이고
사실 추가 해설을 듣고도 알쏭달쏭인데,
여하튼 종합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방면으로 연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같은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떤 한 분이 만들면 누구도 먹기 힘든 쓰레기가 곧바로 될 수 있고
어떤 분이 만들면 그것을 레시피로 해서 전세계의 음식 시장에서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는데 조금만 순서를 바꾸어 강제로 배당하고 이것을 강제해 끝까지 다 먹게하면
곧바로 그 상태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원래대로 순서대로 누군가 음식을 각기 원하는대로 잘 만들어 잘 서빙을 해주면
곧바로 그 상태가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재료로 마이너스가 무한히 만들어질 수도 있고
똑같은 재료로 플러스의 가치가 무한히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은
나름 주어진 환경 조건에서 최대의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모두의 문제의식과 같다고 봅니다.
약간 비현실적인 논의가 개입되어서, 논의자체의 논의가치가 떨어지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lab님이 설사가 난 세 사람이 하나의 화장실을 동시에 사용하고자 할 상황처럼,
서로 물리적 한계에 부딛힐 때
제가 낸 문제는 한번 고민하며 풀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면서
그 해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시더군요.
결국 접근하는 각도는 서로 다르지만,
최종적인 목표자체가 자신도 최상이 되고 남도 최상이 되게 하려는 가운데
이런 문제의식이 출발한다는 점에서
서로의 문제의식이 크게 다르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lab님이 최근에 여기저기서 찍어온 사진을 보다 보니
어느 절에서는 깨진 항아리로 대문을 장식할 만한 예술품을 나름 아름답게 꾸며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는데,
지금 비슷한 문제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남들이 내다버려야 한다고 하는 쓰레기나 그 모든 것이
사실 다 그런 가치를 갖는 것일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의 눈에 그런 것들이 모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doctr님이 lab님이 이번에 찍어온 사진들 가운데 삭제할 내용이라고 lab님이 폴더에 분류해 넣어 놓은 사진들을 보더니
이것들도 만일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이라면 대단한 예술이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저도 한번 보았는데
정말 그것들이 사진이 아니라 정말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면 삭제하기 아깝다고 생각이 되기는 됩니다.
그러나 너무 사진 수가 많다보니, 폴더 용량 때문에라도 삭제해도 되고
또 만일 필요하면 그런 것은 사실 주변에 너무 많이 널려 있으니
굳이 그렇게 찍지 않아도 될 것도 같고
또 찍어도 될 것도 같고
이 폴더에 넣거나 저 폴더에 넣거나 무슨 상관인가.
그런 여러 복잡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일단 제가 문제를 낸다고 낸 상태에서,
답을 최근에 제출하고 그 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으니,
저는 이번에 그 문제에 집중해보기로 합니다.
저 역시 퀴즈도 그런 차원에서 제 나름 내본 것이고
여기에 제시하는 내용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제 생각일 뿐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고,
~~
//////////
우선,
1번 문제나 2번 문제를 lab님처럼 물리적으로 접근하여
각각의 공(알)을 늘어뜨려서 각 알을 미세하고 녹이고 얼려 융합시킨다.- 알루미늄
나름 그럴 듯 합니다. 그렇게 하면 3개까지는 정말 쉽게 되겠군요~(^^)
2번 문제 한 공간에서 다른 공 안에 서로 들어가지지 않는 공 3개를 하나의 공안에 모두 원만히 넣어 보십시요.( 배당 점수 0.5점)
문제가 되는 공들이 놓인 범위를 모두 캔으로 둘러쌌다고 하고 이 캔 벽을 블랙홀로 만들고 안은 온전히 비워(beer) 화이트홀로 만들어 무한히 시간을 미분하여 세개의 공을 배치한다.
여기에는 블랙홀 집적기와 배출기를 함께 이용하면 된다.
이론상 순서적으로 배치되지만, 사진기 셧터와 빛의 모습의 관계처럼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동시에 3개의 다른 공이 한 좌표에 동시 존재하는 결과를 물리적으로 얻는다.
이렇게 답을 내셨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서로 다른 공을 3개 놓고 이것을 한 좌표에 포개어 놓는 방안을 찾을 때,
우리가 보는 '서로 다른 공'을 어떤 것이라고 보고 이 의문을 접근하는가가 처음 문제해결의 단서가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아무리 현실에서 노력해도 한 좌표에서 세 개의 공이 겹치는
동시에 또 서로 별개로 따로 따로 존재하는 그런 모습을 얻어낼 수 없는 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상황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식의 출발상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눈을 떠 지금 빨간색이 보이는 시점에서 빨간색을 보면서
동시에 노란색을 보기를 원할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충족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말합니다.
지금 한 좌표에서 얻고 있는 내용으로 한 공이 있는데,
그것을 얻는 동시에 또 다른 모습의 공까지 얻기를 요구하기에,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출발점부터 갖고 있는 본래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경우에는 그것이 실현되어도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이상한 공을 만들어 낸 것이어서
원래 요구한 각 내용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또 해결이 안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1이 2도 되고 3도 되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만들기 힘들지만,
정작 그렇게 만들어도 이제는 그것은 앞의 1, 2, 3이 아니니
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내의 한계가 실질적으로 어느 차원에서의 한계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긴 글을 시작하면서 제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문제와 관련이 된다고 봅니다.
중복되지만, 다시 한번 여기에 적으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본래 없는 영원불변한 실체,
또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참된 실재의 모습,
이런 것을 붙잡고 평생을 논의한다해도 실익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대하는 현상들은 모두 참된 실재가 아닌데도 이것을 실재라고 여기고 여기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이유는 그것이 좋다거나 싫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진짜라고 여기며 집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 진리가 중요한가.
참된 실재가 아닌 것은 참된 실재가 아니라고 놓고,
얻어진 내용은 실재가 아니지만 정말 있는 것처럼 꿈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라고 바로 알고
그리고 그런 가운데 좋음 나쁨이 물거품처럼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바탕에서
모두에게 오래 오래 좋음을 주는 상태를 집착없이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라 놓고 그것에 집착하여 고집을 풀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좋음을 실현하려 하고 그런 끝에
서로 요구하는 내용들이 물리적 한계에 부딛혀 끝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불교적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즉 가장 먼저 생각할 점은
우리가 부딛히는 제반의 물리적 한계나 문제는
사실 참된 실재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가상 즉 현상내에서의 문제라는 토대입니다.
가상 즉 우리가 대하는 현실 현상에서는 그와 관련한 여러 차원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우선 우리가 물질적 내용이라고 받아들이는 내용은 모두
우리의 정신이 감각해낸 감각내용물이고
결국 각 주체의 정신안의 내용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얻어 갖게 해주는 참된 실재는 사실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물리학과 불교의 차이는,
지금 같이 보고 만지는 내용을 그대로 놓고
이에 대해 그 의미와 차원을 인식하는 방식에서부터 우선 차이가 발생합니다.
즉, 눈으로 본 내용을 놓고,
물리학자는 이를 물질이라 하며
물질이란 단어의 의미안에 그것이
- 자신의 주관과 별도로 실재하는 객관적 물질적 성질이나 내용이라고 - 전제하고
여기에서 모든 문제를 출발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것이 실재하는 내용은 아니다, 실재하는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공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모든 현상적 내용들은
6경-6근-6식 즉 18념소연경에서 얻어지는
마음 안의 내용물이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우리의 정신은
그런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의 반응 변화로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이처럼 각기 대하는 모든 세상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 안에 들어온 내용물이거나 내용물들로 구성되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됩니다.
정신이 세계의 요소이지만, 정신은 세계의 요소를 내용물로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과학자나 의학자가 정신은 자신이 본 세계의 물질적 요소안에서
물질반응처럼 형성되고 일어나는 반응내용의 하나로서 보는 것이라면,
불교에서는 오히려 이들 세계의 요소를 그 안에 내용물로 담고 있으며
그 안에 변화해 시시각각 들어오는 내용물과는 달리
그 내용물을 담는 변하지 않는 그릇이라고 보는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첫 출발부터가 조금 서로 다르게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내용물이나 정신을 각기 무엇이라 이해하던,
여하튼 눈을 뜨거나 귀로 대하거나 등등에서 일정한 내용을 감각하여 서로 얻는다는 것은 같다고 보고,
다시 이것(물질, ~ 정신내 감각내용물)을 바탕으로 놓고
이를 통해 좋다거나 나쁘다는 느낌도 갖고
다시 이에 대해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관념도 갖고
또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판단도 하고,
기타 가지가지 추론이나 분별 판단도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은 역시 또 앞에서 말한 감각내용과는 조금 성질이 다릅니다.
그것들도 역시 정신안의 내용물이지만,
앞의 감각한 내용물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각기 다른 차원의 내용들이 갖는 성질 차이를
불교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의 성질 차이로 제시합니다.
●
변계소집성이란 즉 앞에서 말한 느낌, 관념 분별 판단 상상 그런 내용처럼,
마음안에서 감각으로 받아들인 내용을 바탕으로 놓고 이후 이리 저리 억측을 내어 집착하는 내용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사진을 볼 때 저것은 사람이고 저것은 나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람과 나무의 존재가 그렇게 우리의 의식안에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심리학 테스트에서 행하는 사진 테스트를 생각해봅시다.
즉 수많은 점들로 그 형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점을 뿌려 놓은 사진을 하나 제시해 놓고
이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 하고 사람마다 물으면,
각 사람마다 대답하는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거미로 보인다거나, 가면 쓴 사람으로 보인다거나 하는 등등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 답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
본래 여기에 대해 딱 옳은 답이란 없습니다.
다만 수많은 답 가운데에서 그나마 표준적 내용이라는 것을 통계조사를 통해 얻게 되는데,
같은 사진을 보고 비교적 다수가 많이 대답하는 내용이 나온다면
그 내용을 표준으로 놓고
반대로 여기에서 동떨어진 대답을 하는 경우가 나타나면,
표준에서 벗어난 대답이라고 하게 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심리학자는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이 왜 그런 비표준적인 이상한 대답을 하는가
그렇게 답하게 되는 연유가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상황에 큰 질적차이가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각한 내용을 바탕으로 얻는 관념적 내용을
모두 변계소집성이라고 불교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명백하고 선명하게 사람을 찍은 사진을 보는 경우에도
한 사람이 이것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사람이 아닌 다른 형체라고 관념한다고 할 때,
그 사진에서 얻는 사람이라는 표준적 관념과
전혀 엉뚱하게 얻는 엉뚱한 형체에 대한 관념이 다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에 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런가.
우선 관념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일정한 같은 감각내용을 기본적 바탕으로 같이 놓고도,
각기 여러가지 방법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내용을 얻어 가질 수 있습니다.
정말 선명한 하나의 사진 예를 들어 나무에 기대서 있는 사람을 선명하게 찍은 사진 하나를 놓고
이 안에 그것말고 또 다른 무슨 형체가 숨겨져 있나 생각하며 숨은 그림찾기를 해보거나,
또는 이 사진에서 무슨 다른 내용들이 연상되는가
또는 이 사진 안에는 무슨 상징이나 메세지가 여기에 담겨있는가를 찾을 때처럼
그런 의식을 갖고 사진을 대하면,
사람 하나를 선명하게 찍은 사진에서도
수많은 다른 관념을 각기 얻어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추상적 예술작품이나 조각품, 사진 등을 대하면서
감상자들이 제각기 달리 얻어가져가는 내용이 다 그런것입니다.
그렇게 비교적 폭넓게 관념이 얻어지고
또 우리의 의식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
앞에 말한 변계소집성의 내용에 모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각내용을 놓고 그에 대해 갖는 표준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내용을 포함하여
시인이나 만화가나 소설가나 갖는 상상적 관념이나,
정신착란자가 갖는 망상이나 착란으로 인해 갖게 되는 관념이
불교의 입장에서는 모두 다 함께 변계소집성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범부의 미망(迷妄)한 소견에 해당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렇게 가진 관념 내용이 무엇이던,
그것은 실체가 없고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또한 그 바탕이 되는 감각내용과도 일치하거나 동일한 것이 아닌데,
정말 그것이 그렇게 있는 것처럼 한 번 잘못 분별해 갖고 난 이후에는
그렇게 자신이 생각한 관념에 집착하게 되는 내용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이란 한자 역시 그런 뜻을 안에 담고 있습니다.
●
한편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앞에서 말한 감각으로 얻는 기초 정신내용물입니다.
감각하는 내용들이 얻어지고 마음안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은
앞에서 살핀 관념들이 얻어지는 과정과는 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의타기성으로 표현합니다.
사진기를 들어 사진을 찍으면 얻는 사진 영상도 그렇지만,
우리가 눈을 떠 감각해 얻는 세계의 모습이나,
또는 기타 귀, 코, 혀 등등의 감각을 통해 얻는 정신적 내용물들은
앞에서 본 관념 등과 같은 변계소집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말합니다.
눈을 뜨면 어떤 모습이 보이는 것은
의타기(依他起) 즉 다른 것에 의존하여 즉 연하여 연기관계로 일어나는 내용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세속적으로는 여러 인연들이 화합하여 얻어진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승의적으로는
이들 현상 모두는 실재를 바탕으로 하여 모두 묘한 진여의 성품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라고도 설명하기도 하는데,
여하튼 여기서는 감각한 내용물(세계의 모습)은 앞에서 살핀 관념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덜 자유롭게 서로 다른 것에 연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내용을 의타기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결국 이들이 우리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현상적 내용입니다.
즉 크게 나눠 의타기성에 의해 나타나는 감각적 내용물,
변계소집성에 의해 나타나는 관념적 내용물( 분별, 판단, 상상, 망상, 꿈, ,,,,)이 현실에서 얻는 현상적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현상적 내용이라고 할 때,
이들 모두의 기본 바탕이 되면서
또 동시에 이것을 얻게 한 가장 기본적 원인이라고 제시할 만한 내용이
실재내용이라고 할 것입니다.
실재내용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만일 눈을 뜨지 않으면 눈을 뜰 때 보게 되는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눈을 감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눈을 뜨면 보게될 그 어떤 내용'-은 없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있는 것이라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의문의 차원이 나의 인식 감각과 관계없이
무엇이 정말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실재에 관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실재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쉽게 말하면, 자신이 지금 눈을 감아 보지 못하는데도 내 의식과는 관계없이 무엇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재로 무엇이고 어떤 내용으로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됩니다.
그것은 또 지금 눈을 떠 보고 있더라도,
실재는 그 모습과 같은가 다른가의 의문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실재내용은 정말 무엇인가하는 의문은
즉 어떤 것이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독립한 상태에서 정말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즉, 눈을 감고 보지 못할 때도
그 실재내용은, 정말 있는 것이고
그 모습도 눈을 뜨면 보게 되는 그 모습 그대로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얻은 현상들이 주관적으로 얻어낸 현상적 내용이라면,
이런 현상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그런 주관과 관계없이 그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실재내용을 얻을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과 같이 추리하고 의문을 갖는데
찾는 의문에 대한 답과 그 내용은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기에 그래서 '없다'라고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추리되기에 또는 없다라고 단정할 수 없기에
반대로 '있다'라고도 답하면 잘못입니다.
왜 그런가.
일단 우리가 빨간 색이라고 보았다면
그것이 실재로도 우리의 의식과 관계하지 않고도
실재내용이 빨간 것인가 의문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실재내용은 직접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하나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실재내용은 자신이 얻은 빨간색과 같다거나 아예 빨간 색이 그 실재내용이다라는 식으로 단정한다면 잘못입니다.
또 같은 이유로, 그 내용을 얻지 못하기에 이제 그 실재내용은 빨간 색이 아니다. 다르다라고 단정한다면 이 역시 잘못입니다.
사실 '없다' '있다' 등의 여러 이분법적인 판단은
바로 앞에 말한 변계소집성의 차원에서 행하게 된
이분법적인 분별의 차원에서 나타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과 같은 의문에서 찾는 내용은 무엇인가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일 이분별적 판단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 상태라면,
자체적으로 매우 해결곤란한 상태에서 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궁색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게 됩니다.
즉 실재내용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있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라고
관념적으로 즉 언어로 표현하게 됩니다.
그것이 궁색하다는 것은 관념상태가 아닌 내용을 관념이나 언어를 빌려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에서 주의할 것은
없다고 할 수 "없다"
또는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라는 표현에서 끝의 "없다"라는 표현에 집착하거나 고집해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단지 앞의 내용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 머물러야 하고,
"~~없다"에 강조를 두면서 그런 '없음' 또는 '~아님'이 그 성질이나 내용이라고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 그런 표현을 통해 가리키는 의미가
'실재가 공하다'라고 표현이 가리키고자 하는 내용에 비교적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끝 부분의 '없다' 거나 '아니다'라는 부분에 이끌려 집착하면
무언가 -없음 또는 아님- 이라는 성질을 말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또 다른 오류에 끌려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또 다시 그것을 무한히 부정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끝에 결국 무엇을 말하게 되는가하면,
결국 이런 이분법적인 분별을 완전히 떠나야만 함을 말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불교에서는 불이(不二) 법문이라로 표현합니다.
본래 실재 내용 자체는 주관과 관계되지 않고
따라서 언어나 관념을 떠난 것이고
찾는 것도 바로 그런 실재의 내용과 상태를 찾는것인데,
그것을 자신의 주관과 주관 안의 언어나 이분법적인 분별과 관념으로
대응시켜 얻어내고자 하므로, 이런 어려운 사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실재가 무엇인가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또 이에 대한 논의와 답을 서로 주고 받으려면,
결국 언어를 빌려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취하게 되는 언어적 수단과 표현이 바로 공이라는 표현이고
또 '공'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앞과 같이 한계가 있는 표현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조금 더 풀어서 이를 말한다면,
이분법적인 모든 분별 판단을 떠나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다거나 ~이 아니다거나,
~과 같다거나 ~과 다르다거나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을 떠난 것이다..
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 떠난 것"은 곧 공이다..이런 것도 아닙니다.
공이라는 표현이 그런 상태를 가리키고자 사용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위 부분은 '하늘이 푸르다'라고 말할 때
'푸른 것은 모두 하늘이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닌 사정과 같습니다.
여하튼
공(空)의 의미에 대해 오해를 하여
흔히 아주 없음(無)과 동일시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무(無)가 본래 유(有)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 이분법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공의 의미에 대해 그렇게 착각하게 되면
공은 무(無)가 아니라 하여 그 오류를 시정해주거나,
그런 오류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오히려 정반대로 공은 유(有)라고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오류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공은 없음(無)이 아니라거나 또는 공은 유(有)라고 말할 때,
이제 상대가 거꾸로 공을 있음(有)으로 착각하게 되면
그것도 오류이므로
그것을 다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다시 실재는 유(有)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 앞과 정반대로 무(無)라고도 말하게 됩니다.
한 예로 반야심경에서 계속 무(無)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반야경전에서 말하는 그 무(無)의 의미는 이런 바탕과 취지에서
사용하는 표현임을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각 표현으로 혼동을 갖게 되는데
왜 이것을 막지 않고 이렇게 혼동을 일으키는 형태로 계속 말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은 일부로 혼동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고
원래 언어와 언어를 통해 가리키고자 하는 상태가 갖는 내용이
서로 그런 상황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래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로써 가리켜 보려고 하고 이해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언어만 놓고 보면 앞뒤가 명백히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사정에서 연유하는 것이지,
공연히, 표현을 혼동되게 하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그것이 실재내용과 관련한 내용일 때
전체적으로 이 부분과 저부분이 서로 모순되는 듯한 여러가지 표현을 번갈아 빈번히 사용하지만,
그 표현들은 그 표현이 가리키는 바가
위와 같은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각각에 위와 같은 상태를 가리키고 이해시키기 위한 표현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실재내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표현들 즉 공, 무, 유 등등의 표현이
실재내용의 앞과 같은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로써 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손가락을 많이 예로 듭니다.
물론 비유에서 든 손가락은 공이나 때로는 무나 유..아님 등등의 표현이고 그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이
앞과 같은 여러 표현으로 가리키고자 한 실재내용이란 것인데
그런데 이 비유와 같은 경우 손가락으로 가리킨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가리키고자 한 '달' 그것으로 알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는 비유이므로 공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실재내용은 비유에서 든 달과 같이 얻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그 표현이야 어떻든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본래 관념(변계소집성)적 이분법적인 분별을 모두 떠나고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상태이며,
그것을 공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낸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실재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표현하게도 됩니다.
원(圓)이라고 표현했다고 진여나 실재가 동그란 것이고 네모난 것은 안되는가..
이런 의미가 아니고,
이것은 즉 현상의 바탕이자, 그런 현상들을 나타나게 한 실재로서 진실한 진여라는 의미이며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성실성이나 진여 등은
앞에서 살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는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 이처럼 문제삼게 되는 여러 내용이 있는데,
또 하나 다른 차원을 문제삼는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하는 이런 여러 내용가운데
이런 내용들에서 그 뼈대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영원하여 변하지 않고 고정된 내용
즉 영원불변한 실체가 그 안이든 밖이든 있다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왜냐하면 현상의 모든 모습이 매순간 각기 다르지만,
그렇다해도 매순간 물은 물로 잘 보고 불을 불로 잘 보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수많은 변화하는 모습 가운데
일정한 각각의 뼈대가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내용으로서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추리를 놓고
정말 그 추리나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 없는것인가를 문제삼게 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만일 있다면 보여주거나 제시하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없다면 어떻게 전 우주에 그런 것이 없는가를 단정할 수 있고 밝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증 과정에는 어려운 논리적 문제가 많이 전제되고
많은 논서나 경전에서도 제시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 그 결론적 입장입니다.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 등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사실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이 현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고 그 내용은 무엇인가 등은
철학적으로도 많이 문제됩니다.
그래서 이 논의는 복잡하고 논증 내용도 다양한데
그런데 만일 이 문제를 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미 변화를 전제로 출발해서 살아가는 생명(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영원불변한 실체는 비록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 됩니다.
영원불변한 실체의 개념 자체상,
우리가 변화를 기초로 살아가는 삶 안에서
변화를 통해 도달할 목표점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있다고 해도 삶에서 이를 고려해야 할 실익이 없고
없다면 없으므로 당연히 실익이 없다는 결론을 취하게 되는데
그래서 실체의 문제는 의문이 제기되고 논의도 되지만,
우리의 현실 즉 변화를 전제로 이뤄지는 삶과
관계를 찾을 수 없고
그런 것이 설령 있다고 가정한다해도 우리의 변화하는 삶에 영향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는 결론만으로도
일단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하튼
불교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논의를 통해
실체의 유무에 대한 논의가 별도로 진행되지만,
앞과 같은 이유로 그 논의를 떠나
그런 실체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을 벗어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고 밝히고
또 없기에 없다고 말하는 입장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시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결국 삶에서 공연한 것들에 집착과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또 그런 상태에 이르는데 그런 내용과 논의가 이바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취지와 목적을 위해서는 사실
복잡한 논리적 추론이나 논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령 그런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해도
위와 같은 관계로 변화를 바탕으로 영위하는 자신의 삶과 관련되거나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해,
쉽게 그런 견해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번뇌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앞과 같이 영원불변한 실체의 유무에 대하여 논의할 때
따지는 실체의 차원이 하나 더 문제됩니다.
●
한편 또 다른 차원을 생각한다면,
그 실질은 감각내용 아니면 관념이지만,
그것이 다른 내용을 가리키거나 표현하는데 이용되는 경우로써,
언어의 차원을 별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자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눈을 떠 보면 그 글자모습을 감각하게 되고,
다시 그 글자모양을 바탕으로 그런 모양에 대해 관념을 얻어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앞에서 말한 것들 가운데 무언가의 다른 내용을 가리키고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언어의 내용이라고 또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
이제 또 다른 차원을 하나 더 제시하면
삶의 목표와 관련되는 차원으로
가치의 차원을 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처럼 현실에서는 여러 다른 차원의 내용을 얻거나 문제된다고 할 때
이를 놓고 다시 무엇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진리의 차원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실재는 앞처럼 공하고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고
그러나 또 그 바탕을 떠나지도 않는 가운데
이 공한 실재의 바탕에서 현실 감각이나 관념이 일어나고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적 내용들을 대할 때
이들은 실재내용은 아닌데,
그러나 정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내용들로서
비유하면 꿈이나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좋고 나쁨과 같은 가치의 문제는
그런 꿈이나 물거품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다시 일어난 꿈이나 물거품과 같은 것이어서,
꿈속의 꿈이고 물거품 속의 물거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처럼 꿈속의 꿈이고 물거품 속의 물거품과 같다고 할
좋고 나쁨이
또 반대로 우리의 삶에서 도달해 얻어내고자 하는 결론적 단 맛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좋고 나쁨을 바탕으로 하여 행복 불행 선악을 모두 문제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꽃을 볼 때 그 꽃의 모습이나
꽃의 관념에 아름다움이나 좋음이 써있거나 들어있어
눈으로 직접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 꽃에서 위와 같은 좋음을 찾으면서
그런 좋음을 찾기 위해 보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사람들이 온갖 문제로 애를 쓰며 살아가는데
결국 무엇을 찾는 것인가.
또 많은 사람이 여러가지로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데,
그들은 또 반대로 무엇을 최종적으로 얻지 못하기에 그렇게 고통받는가.
결국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놓고
그로부터 좋음을 얻지 못하고 반대로 나쁨을 얻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만일 좋음을 얻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거나, 세상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좋음을 구해 얻지만,
그를 통해 모두에게 오래오래 길고 긴 좋음을 주지 못하기에,
그런 이유로 악한 좋음이라고 부끄러워하고 비난을 받는 사정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문제를 가치의 차원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치의 차원에서
가치판단을 통해 목표상태를 정하고 나면
다시 이런 상태를 뜻과 말과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문제되는데
이런 과정을 가치의 실천 방안과 실현 과정의 내용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
길지만 이렇게 복잡한 여러 차원과 문제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의 표준적인 사람들이 문제삼고 찾는 내용,
물리학자나 과학자들이 찾는 내용,
그리고 철학자가 찾는 내용,
그리고 불교에서 찾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같이 내용을 보고 같이 문제를 느끼고 같이 해결방안을 찾는다 하는 경우에도,
그 내용인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먼저
명백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눈을 떠서 같이 무언가를 본다고 가정합시다.
사실 tok님은 이 대목부터 '서로 같은 내용을 본다'는 것부터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논증되거나 단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그렇게 보아 얻은 감각내용을 남에게 그 내용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가?
심지어 자신 내부 안에서도 한 순간의 감각을 그대로 보존한 다음 한 10분 쯤후에 그 내용을 정확히 다시 동일하게 꺼낼 수 있는가?
그리고 이후 그 둘을 놓고 서로 같다 다르다 분별을 시작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가능해야
그 이후 무엇이 다른 무엇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거나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또 남이 본 내용과 내가 본 내용이 서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가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어생활과 추리를 통해 무언가 동일한 것을 서로 같이 얻었다고 전제하고
그 상태에서 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tok님이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의 문제입니다.
한편 감각한 내용이 위와 같은 문제를 갖는다면,
관념내용들은 또 위와 같은 것들이 가능한가?
그러나 역시 이 문제를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역시 같은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tok님이 이런 기초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들 문제는 논리의 구축과 전개 과정에서 그 출발선에서 제기되는 문제라며
연구를 진행하십니다.
즉 사실은 위와 같은 문제로 인해
문제되는 각 내용들에 대해 그것이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거나 단정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러나 그렇다고 추리하면서,
계속 서로 언어를 통해서 수많은 진리를 건설 구축해 쌓아 올리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 올린 현실의 수많은 주장과 논의를 바탕으로,
별 문제없이 생활하고 또 많은 것을 잘 얻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결과적으로 안정되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이 문제를 현실문제를 놓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떨어진 지갑을 자신의 지갑이라고 생각하고 주어들었는데
사실은 남의 지갑이라고 합시다.
이런 경우, 그 남이 따질 때 남의 지갑이면 그가 사과하게 되고
자신의 지갑이 분명하면 오히려 상대가 사과를 하게 됩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tok님은 이 과정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각각의 판단이 가능한 근거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입니다.
tok님의 입장을 따르면
사실 아침에 밖에 나갔던 아이와 저녁에 돌아온 아이가
같은 아이인지 다른 아이인지 판단할 근거를 아무도 본래 갖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그러나 아무도 살면서 이것을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됩니다.
그래서 이상한 상황인데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살고
또 실제로 별 문제가 없이 잘 살아가는데
그렇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tok님의 요즘 진행하고 있는 주제이고
문제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한데
이상한 것을 아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 동원되는 정신작용의 최초 바탕이 무엇인가가 논의의 초점이라는 것인데,
물리학에서 생략하고 건너뛰는 문제도 위 질문이 제기될 때는 같은 상황에 놓이고
그래서 tok님이 가장 기초로 제기하는 동일성 판단의 문제는
모든 실험실 과정에서의 판단문제에 같이 관련되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문제를 엄격히 제기하면
사실 이후 아무 논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임에도 이를 건너뛰고 논의를 계속 진행한다면
사실은 기초가 공중에 붕 뜬 상태에서
수많은 논의나 주장들이 쌓여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해야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지고 문제라고 생각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반 표준적인 관점에서는 또 드물다고 봅니다.
만일 어떤 것이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 액체였던 것이 불이되거나
에너지가 되고 기체가 되거나 고체가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무엇이 무엇인가가 좀 문제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다 무엇인가 동일한 하나를 놓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고 있고 또 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엄밀하게 따지면
한단계 한순간 순간이 다 tok님이 제기하는 문제에 같이 해당되고 문제된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tok님의 논의에 끌려들어가지 않아야
또 반대로 서로 논의를 진행할 수 있고
서로 언어를 통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고도 보게 됩니다.
tok님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현실에서 논의가 되고 대화가 서로 이뤄지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자
연구를 하시므로 그 연구결론을 기대해봅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일단 그 문제를 건너뛰고
서로 눈을 떠서
최소한 "같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같이 "같은 내용"을 본다고 "합시다."
///
그럴 때 그 같이 본 내용에 대해서
그것을 무엇으로 놓고 대하는가에서부터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여기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자가
우리가 눈을 떠 같이 본 것을 하나 놓고 그것은 '물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정신과는 일단 독립해 그 내용 그대로 혼자 떳떳히 그대로 존재하는 외부 객관적 내용 -- 이라는 암묵적 전제와 기초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자는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앞과 같은 인식과 출발에 문제를 제기하고,
실재와 실체의 차원을 별도로 찾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이 불교와 다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현상이며, 이런 현상과 다른 실재나 실체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내용이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내용을 얻지 못한다는 한계가
철학자들에게만 예외가 되어 얻는 상태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역시 찾는 실재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실재내용을 얻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러나 철학자는
그 실재내용이나 실체가 이런 이런 사정으로 이렇게 이렇게 추리되므로
그 실재내용이 이렇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에 대해서도
앞과 같은 형식으로 그것은 이런 이유로 있고 그것은 이런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다 등등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철학자 제각각마다,
형이상학적 추리나 논리전개 또는 상상 등을 통해
실재나 실체 가치 등등의 내용에 대해
그 내용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또 그렇게
내용을 건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남은 주장의 역사적 결과물들이
우리가 오늘날 대하는 수많은 각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주장이거나 결론입니다.
이들 주장이 불교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이들 내용이 그냥 만화가나 소설가의 작품처럼
단순한 상상만으로 쌓여지고 건설된 것은 아닙니다.
tok님이 문제삼고 있는 것처럼
엄격한 논리와 추론과정을 통해서 제시되고 논증을 행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역사적 생명력을 오래 유지해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하튼 그 수많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각기 다른 결론들의 공통점 하나는
일단 불교의 결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
불교입장에서는 그런 해석들은 모두
오류입니다.
그 추론과정에서의 문제점의 공통성은
앞과 같은 차원이 다른 내용들간에서 하나의 내용을 다른 차원의 내용에
덮어 씌우는 오류에 우선 해당됩니다.
예를 들어
변계소집성을 통해 관념으로 얻은 내용을 감각내용차원의 내용으로 곧바로 덮어 씌우거나,
또는 감각차원의 내용에서 얻는 내용을 곧 실재내용이라고 덮어 씌우거나,
또는 관념이든 감각내용이든 그것들 각각을 실재내용이라거나,
또는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 모습(색깔)을 얻고 그를 통해 그것이 사람이라는 관념을 가졌다면,
그는 그 모습에 '사람'이 있다..이렇게 표준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고 그것이 분별 망상에 해당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런가.
앞과 같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관념이 관념차원에서 일어나고 얻어진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가지고
관념차원 밖의 내용에 대해
해당사항이 없는 그런 관념내용을 그대로 덮어씌어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분명 '사람이' '온다'거나 '간다'거나 하는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관념을 갖게 한 감각내용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오고감이 그런 감각내용에 있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표준적인 인식에서는 앞과 같이 비판하는 말이 오히려 더 이치에 맞지 않고 궤변인 것 같지만,
엄격히 보면 이는 관념에서 형성해 가진 내용을 감각내용에 그대로 덮어 씌어 이해하는 현상입니다.
감각내용은 한 순간에 얻는 단면으로서 감각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어느 단면에도 또는 그 각각의 단면을 합하거나 나눠서 살펴본다해도 그 각각에 온다 간다 등은 관념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앞에서 본 다양한 차원과 모두 각기 관련되어
수많은 분별 망상 오류의 견해에 집착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끝내 최종적인 고통을 얻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은 결국 근거없이
다른 내용을 다른 내용에 덮어씌어 이해하는 작용이 잘못이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세속에서 온갖 시시분별 망상분별을 행하고
그에 집착하여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하나의 차원의 내용을 다른 차원에 적용하고 덮어 씌우려면,
각 차원의 내용들 사이에서 그렇게 덮어 씌울 최초의 관계 하나라도 건립하고 난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다른 경우들에도 적용해 나갈 수 있다고 할 것인데,
단 하나의 최초의 관계도 그렇게 건립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tok님이 문제로 제기하는 것도 사실은 비슷한 사정에 바탕합니다.
즉 관계가 그렇게 건립되지 않는데도
건립된다고 보고 계속 그것을 건너뛴 상태에서 또 다른 기초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또 쌓아 올리고 또 쌓아 올리는 것인데,
그 체계안에서 다시 자신이 처음 원하던 값만 얻어내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잘 생활해나가게 됩니다.
tok님은 바로 이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문제는 그렇게 하고도 별 일없이 살아가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의 차원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닙니다.
비유하면, 돌을 쥔 사람이 그것을 쇠라고 생각하고 생활해도,
그것으로 자신이 박고자 한 못을 박는데 지장이 없다면,
그것을 문세삼지 않고 계속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면, 사실은
그렇게 잘못 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도 대부분 사정이 같아서,
꿈을 꾸며 좋아하던, 만화를 보면서 좋아하던, 상상을 하며 좋아하던, 현실을 놓고 좋아하던, 실재를 놓고 좋아하던,
좋아하는 상태를 얻는 것만 본다면 어느 것을 통해 얻던 상관은 없다 하겠지만,
만일 어떤 것이 잘못되어 고통을 받는다면,
그 각각을 혼동하여 접근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고통의 문제를 직면해,
고통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는
기초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정확히 파악한 가운데
문제의 해결에 접근해야 합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해결과정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희망에 맞춰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만 제시하여 좋음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문제되지 않고
내용이 마음에 드는 내용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진리의 정확한 파악이 가장 기초적으로 문제되고
또 문제해결에 있어서도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 강조가 두어지는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암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 즐겁게 사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죽을 때까지 암에 걸리지 않았다, 좋다 이렇게 계속 말하거나
마약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면,
어렵더라도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무엇이 정확한 진리의 내용인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문제에서는
세속에서 표준적으로 진리의 내용이라고 믿고
그렇게 쌓아 올려 놓고 생활하는 것이
총체적으로 잘못된 분별 망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불변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실재내용은 얻을 수 없고
이분법의 분별을 떠나고 공한 것이고,
세상에서 얻는 내용은
실재는 아니지만 정말 있는 것처럼
꿈과 같이 물거품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관해야 올바른 것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관하지 않고
이 각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나가면
해결을 하기 어렵다는 사정 때문입니다.
여하튼 현실에서는
각 내용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바로 자신이 얻는 각각의 차원의 내용들을 서로 다른 차원에 덮어씌우고
최종적으로는 감각내용물이나 관념적 내용을
곧 세계의 실재내용이다라고 덮어씌어 놓고 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견해에 고착되어 고집과 집착을 갖고
절대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고통받고
동시에 원하는 문제의 해결도 어렵게 만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눈에 1자로 보이는 글자를 자신이 그렇게 써놓고
자신도 1자로 보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이 1자가 동시에 2자도 되고 3자도 되게 하려 원하고
그것을 고집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하려면
자신의 상태가 무엇때문에 잘못인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대부분 한계상황에 있다고 하는 문제의 성격은
이런 문제자체가 갖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본래 자신의 견해의 고집과 집착에서 발생한 것인데,
그 고집과 집착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다시 고집으로 해결을 하려하기 때문에 끝내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각형이면서 원인 도형을 찾는다면, 찾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출발하는 고집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처음 견해의 잘못을 고치고
그 고집을 벗어나야 해결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 고집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고집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그 고집 안에서 해결해 내려고 하니,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세상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
그래서 가장 핵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점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면
바로 이런 잘못된 망상과 분별과 견해를 고집하고
다시 그를 바탕으로 갖는 탐욕과 분노
그리고 그에 대해 갖는 집착입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각 차원에서 각기 잘못된 내용이 있는데
그 각각을 관통하고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핵심이
한마디로 어리석음과 사견과 망상분별이고
탐욕 분노이며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원하는 좋은 꿈을 실현해 얻는 방안은
위 문제점들을 각기 끊고 벗어나서
집착의 묶임에서 풀려나
그 반대의 내용들을 반대로 얻어 갖는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
여하튼 이처럼 서로 같은 내용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 기초가 처음부터 잘못 되어 출발하니,
이후부터는 더 쫒아가며 살필 가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살필 가치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모든 표준적 의식과 생활이
바로 이 분별망상에 토대하여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도 사실은
같은 토대에서 출발했던 것이고
또 같은 상황에서 같은 문제를 늘 대하고 같이 문제를 바라보면서
살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교에서 연꽃으로 상징하는 삶의 모습을
현실에서의 바람직한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은 이런 문제 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상태에서의 이상적인 상태가
그처럼 상징되어 표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이제 원래 낸 문제에 집중하여
살핀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한 공간좌표에 서로 다른 공이 위치한다는 것은
어느 차원에서 발생한 한계인가.
비록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물리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는 모든 문제
그래서 현실에서 뜻처럼 잘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lab님이 이 문제의 의미를 현실사회적인 문제와 관련시켜 비유를 들면서
가정하여 설사가 난 3인이 있는데 화장실은 하나여서 이를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할 때
바로 이런 물리적 문제의 해결이 요구된다고
비유하여 이 문제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 그런데 이런 물리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차원에서 해결이 안된다고 하는 것인가 부터 처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개의 공을 한 좌표에 동시에 놓게 한다는 물리적 문제를 제시했으므로
이 문제를 놓고 계속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우선 이런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관념영역의 차원에서는 해결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자체 모순을 갖는 문제'를 만들어 제시한다해도
그런 문제를 제기할 때 그 문제 내용안에 관념적인 차원에서는 그 답도 이미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각형이면서 원인 도형을 만들라고 요구할 때,
그것이 관념영역에서 그런 것을 찾으라는 문제였다면,
이미 그 문제안에 관념적 내용으로 '사각형인 원'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찾는 답이 관념적인 차원의 내용으로만 찾는 것이라면,
관념 차원에서는 그 내용이 문제안에 답도 관념으로 이미 들어 있는 것이어서
해결해야 할 필요자체가 없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넌센스 퀴즈와도 같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문제를 넌센스식으로 재치있게 다른 관념으로 변형시켜
답을 제출하는 것도 결국 같은 변계소집성 차원의 문제에
변계소집성의 차원에서 답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을 세개 한 공간에 놓게 하라는 문제에서
공을 원(圓)으로 바꾸고 원(圓)을 원(願 소원)으로 바꾸고
그래서 각 원(=희망)을 각 사람의 마음에 겹쳐 놓아서 추구해 해결한다는 것이
바로 넌센스적 방식을 통한 문제해결입니다.
그러나, 이런 넌센스적 답이 다 나름 이치도 닿고
의미도 있고 실용성마저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또 그런 말들을 주고 받을 때
서로가 그 문제와 답을
변계소집성의 차원
즉 관념의 차원에서 서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문제해결은
그러나 이런 변계소집성의 차원에서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서는 나믈 이치를 말하고 분별하기도 하고
실용적 교훈이나 가치를 비유적으로 제시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희론(戱論)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논의가 만일 그 본질을 변계소집성 차원에 바탕해 행하는 것이라면,
그런 모든 주장 논의는 결국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담론 즉 희론이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그래서 널리 실익이 없는 희론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나 소설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형이상학적 주장과 철학적 논리학적 사변들까지입니다.
그러나 만일 문제가 처음부터
변계소집성의 희론 차원에서 제시한 것이라면
그렇게 그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선 말하게 됩니다.
●
이제 두번째로 다른 차원에서 답을 찾는데도 구해지지 않아 답답하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것은 찾는 것이 앞과 같은 관념차원에서의 내용이 아니고,
그 관념에 상응하는 "물질적 상황 즉 감각내용들"을 그처럼 상응해서 얻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경우일 수 있습니다.
즉 앞과 같은 경우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원이면서 사각형인 도형이라는 관념에 해당하는 '감각내용'을 얻기를 바라는 경우인데,
그러나 얻어지지 않고 찾아지지 않는다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비록 감각적 내용의 차원에서 답에 상응한 내용을 찾을 때도
그것이 어느 하나의 감각차원을 구하는 경우라면,
예를 들어
단지 하나의 그림 영상으로만 상태를 얻으면 족하다면,
그것을 각 위치에서 각기 그렇게 달리 보이도록 입체적으로 배치해 도형을 놓는다거나해서 해결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옆면에서 사각형으로 보이는데 정면에서는 원으로 보이게 배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런 때는 예를 들어 촉감과 같은 다른 감각
또는 다른 측정수단을 통해 얻는 감각들의 기준에서는
다시 그 상태가 이뤄졌음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관념으로 연인을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그 모습을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보더라도,
다시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는 것은 그것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한계를 해결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감각의 기준에서 최종적으로 고집해 원하는 상태를 얻어야 한다는 고집 등에서 비롯됩니다.
만화에서는 소설과 상상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도,
그리고 그에 해당한 내용을 다시 그림과 사진 영상으로 만들어 놓아도
그래도 현실에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사실은
그런 상황을 말합니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대부분의 문제가 그런 성격을 갖고,
또 그런 의미에서의 해결을 고집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라면,
다 자신의 상태를 부자라고 '생각하고' 살자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은
바로 앞과 같이 정말 원하는 물질들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 해결이 잘 안되는 것은
우선 원하는 내용이 의타기성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내용이 감각내용 차원에서도 잘 해결된다면
그것은 그것이 또 의타기성에 의해 잘 실현될 수 있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원하는 내용이 잘 실현되지 않는 것도
의타기성에 의해 잘 실현되지 않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사실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감각내용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타나게 될 원인-결과의 관계에 따라
즉 의타기성에 맞추어 나타나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한편 이런 문제에서는 단순히 의타기성과 관련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본 변계소집성에 기초한 문제도 같이 포함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목표상태는 역시 관념으로 형성해 갖고 그에 상응한 감각내용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관념으로 만들어 가진 목표가 그런 관념 차원에서도 문제를 갖는다면
이 경우에는 변계소집성의 차원에서의 문제와
의타기성의 문제가 함께 포함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이 변화하는 가운데 살아가면서
동시에 영원불변한 실체적 나로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정은
우선 의타기성이 그런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변계소집성에서 만들어 가진 관념이 관념들간에 상호 자체 모순이어서
실현이 안되는 사정도 함께 있게 됩니다.
어떤 것이 변화해서 '영원불변한 A'가 되었다면
그렇게 된 '영원불변한 A'는 앞의 말에서 밝힌 사정으로 인해
그것이 변화를 통해 이뤄진 것이며 따라서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은 서로 함께 성립하지 못하는 내용이며,
모순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을 함께 다 고집하면 그 자체로
이룰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굳이 이런 경우에도 이것을 해결하려 한다면,
앞에서 본 것처럼,
관념으로 문제삼은 것은 관념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차원에서,
'변화해 얻은 영원불변한 상태'라는 관념이나 말만은 할 수 있다라고 하여 만족하거나,
또는 또 다른 넌센스적인 접근으로 해결하고 만족하면 됩니다.
그러나 역시 어느 한 내용의 고집은 스스로 포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문제를
더 나아가 의타기성이 지배하는 감각하는 내용들 즉 현실에서도 얻고자 하면,
그것은 앞에 말한 의타기성 즉 인과관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뜻과 같이 해결을 못 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뜻과 같이 나타나도록
인과관계에 맞추어 원하는 내용이 나타날 때까지 무한히 노력을 기울여서 나타나게 하던지,
아니면 뜻을 현상에 맞게 바꾸고 포기하던지 해야 해결이 됩니다.
집착과 고집만으로 그런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말하면
이런 경우에 역시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것은
그런 사정인데도 그런 견해를 고집하고 집착을 갖고 문제를 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의 해결 방안이나 답은
그렇게 문제를 만들게 된 각각의 내용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한 고집과 집착을 각기 버리지 않는한,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가 답입니다.
예를 들어 생사문제를 해결하라고 할 때,
생사의 현상 자체를 없애서 해결하려고 한다면, 끝내 해결이 되지 않고,
따라서 위와 같이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변계소집성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관념을 만들어 내고
다시 그 관념내용에 상응한 내용을 의타기성이 지배하는 내용에서도 요구하기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그 각각의 이유로 '그 문제가 결코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다'가 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결되지 않게 되는 원인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각각에 함께 존재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을 원하면,
그 각각에 대해 분별과 집착 고집을 버리고,
올바른 뜻을 새로 갖고 인과관계에 맞춰 올바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또 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예를 들어 관념 판단 영역만 놓고 말하면,
논리학에서는 자가당착과 같은 문제를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패러독스형 문제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의 1차적 원인은 자신이 만든 논리의 전제가
이미 관념영역에서부터 서로 모순되게 만들어 출발하기 때문인데,
그러면서도 그 전제를 계속 고집하는 가운데,
고집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위가 보를 이긴다,
보는 가위를 이긴다. 이렇게 자신이 정해 놓고
가위와 보가 서로 상대하면 누가 이기는가 .
앞 전제를 취하면 가위가 이기는데,
뒤 전제를 취하면 보가 이기니
이것 어떻게 된거냐고 밤새 논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무엇이 여기에서 문제입니까.
이런 경우의 문제는 이해하기 더 쉽게 비유하면
자신이 스스로 가위가 보를 이긴다고 정해놓고,
다시 가위가 보에게 진다는 반대 내용을 얻기를
스스로 고집해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러머 처음 자신이 잘못 정해 세운 관념과 견해에 집착하고 고집한 가운데
다시 그 고집의 바탕에서 또 다른 내용을 고집하고 집착해 추구한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그 두 가지 견해와 고집과 집착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선 벗어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한편 대부분의 패러독스는 관념과 판단의 성격 그리고 그 관념이 가리키는 의미차원
(예를 들어 감각차원, 관념차원, 가치차원, 실재차원,,,,등)을 혼동하는 가운데,
뒤죽박죽으로 논의하기에 발생하는데,
그것이 풀리지 않는 것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집하고 집착하는 동시에
또 그 연장선에서 또 다른 모순되는 내용을 집착하고 찾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런 패러독스 문제를
앞에서 말한 관념영역- (변계소집성의 영역)에서만 순수히 논의되고 그친다면
앞의 변계소집성의 문제만으로 그치게 되지만,
이 패러독스의 문제를 가지고 다시 감각내용의 차원에서도 상응한 내용을 얻어야 한다고 끌고 내려오면,
그것은 변계소집성의 문제인 동시에 의타기성의 문제로도 됩니다.
의타기성에서는 의타기성의 차원에서 별도로
감각하는 현실내용을 의타기성에 의해 나타납니다.
그러니 이에 들어 맞지 않으면 해결이 안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날아가는 화살은 무한한 미분화된 공간에서 정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한 사람이 화살을 쏘면 화살은 날라가 나무에 박히는가.
이 경우에도 정지하게 만들라고 요구하거나,
또 공간은 무한이 미분가능해서 무한한 지점을 통과해야 다른 지점으로 갈 수 있으므로,
달리기 선수는 앞에 가는 선수를 유한한 시간안에 앞지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는 달리기 선수가 앞 선수를 앞질러갈 수 있는가.
앞지르지 못하게 만들라고 요구한다면,
이런 문제가 바로 그런 성격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만일 그 문제가 변계소집성에 만들어낸 고집때문이라면,
풀리지 않는 것은 바로 그 고집 때문이며,
또 풀리는 것도 그 고집과 집착을 벗어나기 때문에 풀립니다.
또 문제가 의타기성과 관련된 부분인 경우는
그거은 의타기성에 의해 나타날 내용은 나타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 경우에 관념적인 문제는
넌센스로 관념의 문제들을 접근하면 문제를 다 풀 수도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시인의 심성처럼 논리학자가 고집하는 모든 전제와 고집에서
묶이지 않고 변계소집성의 영역에서 자유로 넘어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념의 영역에서 풀리려면 시인의 심성으로 "풀려나와야 하고"
묶이려면 스스로 만든 고집에 스스로 계속 갇혀서 묶여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시 의타기성의 영역에 동시에 얻어내려면,
의타기성의 영역에서는 의타기성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는 역시 의타기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상상은 비교적 다 자유로운데
그러나 현실은 무엇이던지 원하는 대로 왜 안되는가는 사실 그런 이유입니다.
의타기성은 말 그대로 다른 존재에 서로 의지하여 서로 화합하여
그 모습을 나타내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됩니다.
불이 나무를 대하면 연기와 재가 나온다는 것은
어떤 논리학자가 그렇게 관념을 조작하여 만들어 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불과 나무의 관념 연기 재의 관념을 정의하고
그 관념을 분석해도 이런 관계가 관념의 영역만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원인으로 본 불 나무 안에 결과인 연기나 재가 이미 들어 있었는가. 없었는가.
이미 있었다면 그 불을 왜 연기나 재라고 하지 않는가.
만일 이미 없었다면 왜 불에서 연기와 재가 나오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없는 다른 것들에서는 또 왜 또 나오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이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타기성의 내용에서 그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그것들이 각기 서로 닿거나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내용을 대할 때 그런 관계로 파악되게 되면
그것들을 그렇게 묶어 이해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하면 우리가 본 나무나 불 연기나 재는
마치 영화 스크린이나 만화의 종이 위에
앞 뒷장에 그려진 그림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는 승의적인 차원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아니며
또 이들 각각이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화합하는 관계라고 제시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음을 반복하여 보게 됩니다.
또 그 관계를 떠나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세간에서 관찰되는 관계를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의 관계로 제시하여
바로 현상들 간에 이렇게 서로 서로 관련지어 파악되는 상태를
인과 연 그리고 결과의 연기관계로 묶어 제시하는 것입니다.
나무와 불, 연기와 재가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속제적으로 연기관계로서
서로가 파악되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 반대로 말하면 의타기성의 영역에서 구하는 내용들은
이 연기관계를 벗어나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도 같습니다.
의타기(依他起)라는 표현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연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이고,
또 그 관계를 벗어나 엉뚱한 내용을 구하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함께 의미합니다.
앞에 말한 관념들 즉 변계소집성도 사실은 넓게 보면 연기에 지배됩니다.
관념이 엉뚱하게 또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그 관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감각내용이 나타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도 넓게는 관념내용들이 나타나는 연기관계에 의합니다.
그런데
만일 변계소집성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관념 내용을 가지고
의타기성의 영역에서 나타나지 않는 내용을 엉뚱하게 만들어 찾는다면,
나무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상태에 마냥 빠져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 아무리 고집하고 고집해도
그것이 구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 무엇때문에 문제가 된 것인가.
한마디로 위에서 살핀 것처럼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의 각각의 문제와 이 둘의 상호관계상의 문제가
서로 복합되어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관념의 영역에서의 관념과 판단차원의 문제는 그 문제대로 발생하고,
감각영역에서 연기되어 나타나는 감각내용의 문제는 문제대로 있고
이 둘이 서로 또 관련되어 문제가 함께 일어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 문제외에도
사람들은 이런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이 갖는 문제의 성격을 또 서로 혼동합니다.
그것은 감각한 내용에 자신이 만들어 가진 관념내용이 그대로
존재한다고 덮어씌우는 의식 때문에 발생합니다.
나무를 태우면 재가 되는 것이므로,
나무라는 관념을 갖고나서 불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역시 나무의 관념도 재의 관념으로 바뀌게 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관념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생각했으니, 자신이 밥을 먹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두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라는 글자를 써놓고 불이라는 글자를 옆에 써 놓으면
나무라는 글자가 재라는 글자로 변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 논의하는 가운데에는
이렇게 서로 각 영역의 다른 성격을 혼동하는 가운데
논의를 뒤죽박죽으로 전개하고
서로 시비분별을 끝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대단히 많습니다.
그것은 넌센스 퀴즈 풀이 차원에서가 아니고
실제로 치밀한 진리 추구나 가치판단의 차원
현실생활 모두에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불교의 논서나 논의과정에서는 그런 문제가 한층 더 빈번하게 일어나기 쉬운데,
그것은 불교에서는 또 다른 차원을 또 언어로 표현하여 논의하기에
더 심해지는 측면이 있게 됩니다.
즉 불교의 주된 관심사인 실재내용 들에 관해서도
그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는 위와 같은 언어를 같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가장 근본원인은
바로 이런 논의를 진행하는데 사용하는 언어가
본래 그런 문제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여러 문제는
tok님이 논리학의 근본 문제로 제시하는 각 영역에서 갖는 문제와
이 두 영역을 연결시켜 관련시켜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근본문제와 관련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언어로 서로 논의할 때는
그 언어가 가리키고자 하는 다양한 내용들 사이에서
먼저 혼동을 일으켜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리키는 다양한 내용들 각각에는
각기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배를 먹은 배로 배를 탔다'고 말할 때,
각 배가 무슨 배를 의미하는 것인지
서로 의미를 구별해 이해해야 하듯,
어떤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가운데에서도
동일한 의미 분별이 기초적으로 필요합니다.
글자가 같다고 이 내용이 다 서로 같다고 이해하거나,
또는 같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혼동에 빠져서
그 혼동 문제 자체로 인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위와 같은 기초적 의미 혼동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문제에 실질 내용들에 들어 있는
희론적인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희론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또 그런 이유로
그 희론의 굴레에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관념판단차원에서 갖는 문제나
감각차원에서 갖는 문제의 구별이
무슨 문제가 그렇게 크게 될 것인가.
사람들이 그 정도도 서로 구별하지 못해 문제가 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처럼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분야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서로 심대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이란 하나같이
바로 현상에서 얻어 갖게 되는 각기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을
모두 다 함께 가지고
이것을 서로 혼동하면서
뒤죽박죽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세간에서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많이 말하는데
왜 그것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글자는 글자대로
관념은 관념대로
느낌은 느낌대로
감각은 감각대로
가치는 가치대로
실재는 실재대로
...
그 모두가 다른데
이처럼 그 내용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 상호가 서로 다 뒤죽박죽 혼동되기도 하고
또 이것을 모두 다 함께 충족시키기를 요구하기도 하기에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하나같이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지므로,
먼저 이 문제를 살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혼동을 벗어난 다음에,
감각내용을 상응시키고 있는 관념문제에서 해법을 찾는다면, 다음입니다.
우선 관념영역에서 만들어 놓은 고집을 유지한 채 고집해 찾는 결론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즉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그런 잘못된 견해와 집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그 문제의 근원인 망상분별 집착에서 풀려나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대부분 현실에서 제기하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으로서
사견(邪見)에 집착하여 묶이지 말고,
잘못된 망상 시시분별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견을 갖는 것이
근본 해결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그 잘못된 사견에 집착한 가운데
그 사견에서 비롯된 내용을 집착하여 추구한다면,
그 문제는 본래 그런 이유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견해를 가진 다음
올바른 목표를 세워서,
그런 올바른 목표는
현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기관계에 대해 이해를 하고,
그 연기관계에 따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해결방안이 됩니다.
어떤 분은
만일 그렇다면 처음 한계에 부딪혀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본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그 답을 구하지 못한 것 아닌가.
그러니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바로 그런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의 해결방안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가 생사 윤회의 고통을 해결하자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떤 이가 그래서 부처나 보살이
죽지 않았는가. 결국 다 죽지 않는가.
그러니 해결이 안 된 것 아닌가. 이렇게 비판한다면,
바로 그 문제는
그런 의식에서 일어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오히려 그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의 해결방안은
그렇게 문제를 고집해 집착해서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해결방안인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고집하는 가운데 또 다른 내용을 집착해 추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결방안이라고
제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해결방안이자 수행방안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근본원인
잘못된 견해의 고집을 일으키는 근본 어리석음 망상을
깨뜨리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경우에서의 해결방안이라면 사실 그것이 해결방안인 것이고
반대로 여전히 계속 그렇게 고집과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끝내 그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이 답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 그러나 전에 lab님이 제 문제에 답으로서,
알루미늄 캔 비어가 답이라고 하면서,
설명하기를,
블랙홀 집적기를 통해 캔의 형태로 블랙홀을 비우고 안을 비워 화이트 홀로 만들어 그 안에
무한히 순차적으로 다른 존재를 배열해내어
관찰자가 보는 동일 순간에 여러 형태의 물질적 존재가 존재하게 한다고 제시했는데,
사실 이 경우 남는 과제는 그것이
관념적으로 자체 모순이 아니고,
또 현실에서도 인과관계에 의해 실현가능한 내용이라면
인과관계에 바탕해 꾸준히 노력하여
말씀하신 것에 상응한 그런 내용들을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 남는 과제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실현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러나 생각한다고 모든 것이 다 실현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정은
이 경우에도 같습니다.
그것이 말이나 관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기관계에 따른 노력을 통해 얻어내야 할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
다만,
저는 사실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그렇게 힘들여 새로 만들어야 하는 내용이 그것이 아니라,
본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현실을 그렇게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답이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받은 앞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답을 드리면서
그와 관련한 내용으로
경전을 통해 lab님에게 제시한 구절은 화엄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
일일미진중 일체제불찰
제불급보살 불자개실견
제찰부적취 불란불박책
일체일입찰 이역무소입
...
...
一一微塵中, 一切諸佛剎
諸佛及菩薩, 佛子皆悉見
諸剎不積聚, 不亂不迫迮,
一切入一剎, 而亦無所入
...
(T09n0278_p0456b15)
하나하나의 미세한 티끌 먼지 속에,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절이 있는데,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부처님제자들이 모두 다 이를 보고,
모든 절은 서로 쌓여 어지럽거나 좁혀지거나 오그라들지도 않고
일체가 하나의 사찰에 들어가며 또한 들어감이 없다...는 의미인데,
이와 비슷한 구절은 경전에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가 다시 문제됩니다.
예를 들어 해인사나 불국사 통도사 송광사 그와 같은 절들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티끌 속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이 구절이 그런 의미라면,
앞에 낸 처음 공들을 포개 놓는 문제도 같은 이치로 이미 그렇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을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해 접근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본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내용을 말한 구절로 이 구절을 이해하고 접근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면
처음 낸 문제에 대한 답도
사실은 위 구절의 내용처럼 이미 그 상태가 해결되 주어져 있는 상태라고 해야 하며,
단지 그 내용을 어떻게 직접 볼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라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하면,
lab님의 방식처럼 그런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를 인과법칙에 따라 만들어 내지 않더라도,
이미 그런 의미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하니
단지 그렇게 만들어진 상태를 볼 수 있는 광학기계를 만들거나 하여
한 티끌 속을 들여다 보거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비록 모든 경우 그런 물리적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앞의 방식처럼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 지배하는
관념과 감각내용과의 관계에서 각각에 맞추어 그 상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결이 된다면 또 그런 차원에서 해결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그런 의미로 제가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위 구절이 정말 변계소집성의 관념내용에 상응하여
의타기성의 감각내용의 차원에서도
그처럼 상응해서 나타나있는 내용인가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도 현실에서 티끌 속에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그러나 말로써 그렇게 본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도 현실의 감각내용 차원에서는 그같은 내용을 볼 수 없는데,
단지 관념만 그렇게 본다거나 본 것이나 같다고 생각하자는 뜻으로
이 구절을 제시한 것이라면,
결국 이 구절은 처음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의 차원 즉 관념차원에서의 표현인 것이고,
결국 이 구절은 역시 희론 즉 장난의 논의나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런 경우 이런 내용들은 단지 관념만으로
또는 시인의 시적 표현으로, 또는 상상으로 망상으로 한마디로 엉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내용이 그런 희론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여기에서 위 구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껏 앞에 제시한 관념이나 감각내용들이 모두
기본적으로 실재가 아님에도 망상에 기초해 얻어지는 내용인데
그러나 이 구절의 내용은 그렇지 않고
실재내용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차원은 앞과는 다른 차원이고
실재의 차원에 대한 내용으로서
지금껏 앞의 내용이 분별 망상에 바탕한 엉터리 내용 또는 희론인 것과는 달리
이 구절은 실재에 대해 참다운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각기 다른 차원을 혼동하기에
같은 구절을 대하면서도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만일 이 구절을 관념이나 감각내용 즉 현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하고
그 내용처럼 정말 티끌 속에 그런 것들이 있는가 하면서
현미경이나 광학 전자 현미경을 만들어 놓고
하나의 티끌 속 또는 분자 원자 전자 안을 뒤지고 찾아가면서
정말 위 구절대로 그런 내용이 보여지는가를 찾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잘못 생각하고 답을 찾고 있는가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으니,
이 표현은 결국 말장난이고 단지 말로써 말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역시 같은 이유로 서로 다른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여,
만일 어떤 이가 꿈을 꾸면서
날개나 동전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그 날개나 동전이 어느 장소에 들어 있는가를 찾는다면 허망한 일입니다.
또 반대로 자신이 방 안에서 잤는데
꿈에서는 왜 그 방이 나타나 보이지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해도
또 허망한 일입니다.
이 각각은 서로 다른 내용을 다른 곳에서 구해 찾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에서 위 구절은
결국 승의 즉 참된 실재의 내용에서
그와 같다고
언어로써 그 상태를 그와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그런가를 자신도 보려고 한다면
그 입장에서 찾아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른 입장
꿈에서 찾거나,
관념 안에서 찾거나,
감각으로 얻는 현실내용 안에서 찾으려 한다면,
앞의 비유와 같이 이 역시 허망한 일이 됩니다.
또 본래 허망한 것을 참되다고 잘못 여긴 가운데,
앞 구절과 같이 참된 내용을 나타내는 표현을 보고,
이에 해당한 내용이 자신의 허망한 차원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오히려 이 표현이 허망하다고 생각하면
이미 뒤바꿔진 가운데 다시 뒤바뀜을 구하는 것입니다.
앞의 비유로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본 내용이 꿈을 꾸는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꿈을 꾸는 가운데 '현실에서 보았던 내용이 엉터리였다'고 생각하는 잘못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위 구절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바탕에서 뒤 바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어표현이야 이들 각각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에
본래 혼동을 주는 것이지만,
사정을 위와 같이 이해한다면,
위 표현은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에 바탕하여
말장난으로서 하는 희론으로 하는 표현도 아니고
의타기성에 바탕한 내용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본래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상태를
이해시키고 설명하기 위해 말을 빌려 표현한 것이고
그 내용은 오히려 참된 실재에 관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말이 갖는 한계로 말이 갖게 된 문제를 통해
그 말이 가리키는 내용까지 뒤바꿔 이해하게 되면
이미 뒤바꿔진 가운데 다시 뒤바뀐 결과를 얻고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대할 때는
왜 실재내용의 차원에서는 티끌과 부처님 사찰 그런 관계가
구절처럼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하게 되는가.
그것을 불자들은 다 본다는데 무엇을 보기에 그렇게 본다고 말하는가.
그런 입장에서, 그 내용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중요한가.
진리나 참된 실재는 지금 이 구절이 가리키는 내용이고
망상과 거짓 현상은 오히려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재의 내용에서는
앞과뒤,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전 후 등등을 모두 얻지 못하고
심지어 현상에서 얻은 이것과 저것의 구별 차이도 얻지 못하므로,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와 같이 언어로 표현하게 됩니다.
만일 현상에서 세운 고집과 집착을 그대로 갖고
이 문제를 끝내 그 고집의 바탕에서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꿈을 꾸다 깨어난 사람이 현실 내용들을 대하고 마음에 맞지 않거나 그것이 오히려 허망하다 여기고,
오히려 전에 꾸던 꿈 속으로 다시 들어가 원하는 꿈을 꾸기 원해
잠을 자려 노력하는 것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위 비유처럼,
앞곽 같은 표현이 나타내는 실재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오히려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지금껏 현실에서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나 감각이 오히려 진실이고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 표현이 나타내는 실재의 내용은 부정하고,
대신 이전처럼 자신이 찾는 관념도 세우고,
그 관념이 관념들끼리 자체적으로 모순되지 않도록 만들고,
다시 관념에 상응한 내용을 감각으로도 상응시켜 얻을 수 있도록
인과관계에 바탕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앞의 물리적 문제에서
3개의 다른 공을 한 좌표에 놓는 문제도 같습니다.
이 문제를 실재의 차원에서 풀려 하지 않는 경우에는
결국 관념과 감각으로 얻는 현상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결국 앞에서 본 방안을 다시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관념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선 관념 차원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한 좌표에 3개의 공이 있다고 가정할 때,
다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1개의 공이라고 해야 하며, 3개의 공이 아닌 것이다라고 관념해야 한다면,
이는 문제 안에 관념 자체의 문제로 해결이 안되는 것이므로,
관념차원에서 관념과 관념간의 충돌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념차원의 해결이 있고 난 다음,
이제 감각에서도 그런 관념에 상응하는 감각내용을 얻기를 원하면,
그렇게 되는 인과관계를 찾아 노력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가능한 것은 가능하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 바탕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자가 이미 그와 같이 되어 있다고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엄교학에서는 이외에도
십현연기라 하여
동시구족 상응. 광협자재 무애 등을 말하는데
이들도 모두 그런 의미로 이해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표현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불자는 길거리에 차가 막혀도
넓고 좁음이 자재 무애하여 뚫고 나갈 수 있다거나,
출발지나 목적지나 다 같아서
동시에 다 이미 도달해 있으니 해결이 되었다..
이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바가 현상에서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
현상에 바탕하여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겠지만,
그런 차원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꿈과 현실 가운데 꿈은 허망하고 현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현상적 현실과 실재의 내용 가운데는
실재가 중요하므로
이와 같이 말하게 됩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꿈을 기준으로 현실 내용을 판단하고
또 현실내용을 기준으로 실재내용을 판단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꿈에서 날개를 얻었으니, 현실에서 온 방을 뒤져 날개를 찾는 것이 허망하듯,
현실에서 광협이 있고 전후가 있고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실재에서 그것을 찾아 나가겠다는 것도 바로 그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잠을 깨 현실내용을 보고 꿈에서 꾼 꿈 내용들의 허망함을 깨닫듯,
실재내용을 올바로 깨달아,
현실에서 얻고 의지했던 감각, 관념, 꿈이 사실은 허망함을
반대로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최종적으로 이런 논의들은
살아가는데 무슨 효용을 갖는 것인가.
즉 앞과 같은 물리적 문제의 해결이 가치차원에서는
어떤 가치의 상태를 얻기에 문제삼은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논의한 것들의 가치차원에서의 접근
그리고 목표설정과 실현방안에 관련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일 앞과 같은 물리적 문제가 제기될 때,
물리학적 문제로 접근하여
그 한계를 돌파하면
그로 인해 서로 간의 상충하는 희망으로 인한 충돌이 줄어들고
생활이 편해진다지만,
앞과 같이 실재에 관한 차원으로 접근하여 설명한다면
그런 이야기들은 현실에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는가하는 의문도
이와 관련되는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공을 세개 한 좌표에 놓는 문제가 사실 그런
물리적 한계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합시다.
이 상황은 lab님이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상황으로 바꾸면
화장실은 하나인데 3사람이 동시에 설사가 나서
서로 쓰겠다고 다투는 상황이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 공간에 3개의 화장실을 동시에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다음입니다.
만일 이 3인이 모두 지혜가 깊고 현명하다면 그런 문제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습니다. (^^)
또한 비록 그런 상황이 우연히 된다 하여도,
변기를 3개 동시 공간에 만들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부처 보살 불자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본다고 앞에 소개한 게송은 말하는데,
그것은 화장실이
현상의 차원에서 그렇게 만들어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재의 내용이 게송과 같이 그렇게 봐야 하고,
우리가 대하는 현상은 실재가 아니며, 실재하지 않는데도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앞과 같은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그에 집착하고 고집하고
그 집착으로 인한 번뇌를 일으켜 갖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위 문제가 물리적으로 현상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에 대해
최종적으로 집착과 고집으로 인한 번뇌를 일으켜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가치차원에서 위 상황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현실에서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것이 생사가 벗어난 상태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위와 같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분별 망상 견해에 집착한 이는 생사현상에서
큰 고통과 번뇌를 일으켜 갖는데,
그렇게 해결한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 풀여 있으므로[해탈(解脫)]
앞 상황에서 해결하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물리적 상태가 충족되지 않아도,
그로 인해 문제를 갖지 않는 것은
앞과 같은 관계로
어리석음과 집착 번뇌를 벗어난 현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하다면,
그것은 또 연기관계에 의해서 필요한 변기를 많이 만들어서 해결하려고 하지,
게송을 읊어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문제를 조금 더 쉽게 보아
이를 관념 차원의 해결을 구한다면,
그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꼭 자신이 변기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변기로 관념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쉽게 알 것입니다.
그 때 그 때 변기기능을 하는 것이 변기고
배출하는 것이 배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최종적으로 어느 경우에든
모두 선하고 좋은 상태를 얻는 것에 위와 같은 다양한 방안을 취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3인이 모두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때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서로 화장실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고집하고
그것도 전부 자신의 눈에 화장실로 보이는 그 화장실만 화장실이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고집하고
그것도 바로 그 시각에 자신이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갖고 서로를 대한다면,
때로는 화장실을 차지해야 한다는 그 절박감에 상대와 싸우다
둔기로 내리쳐 서로서로 상해를 입히고
또 이후 이 일로 두고두고 억울해 하며 원한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보는 문제란 모두 이런 비유 속에 포함시켜 넣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것이 해결책인가는
앞 경우와 뒤 경우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앞처럼 모두가 되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제 만일 한 사람이 현명하나 나머지가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은가?
이 경우에도 물론 가장 근본적인 방안은
모두를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입니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해 고집을 못 꺽는 상태라면,
이제 정말 고집센 나머지 사람을 위해서
그 문제를 물리적인 문제로 끌고가
앞의 예라면 어떻게 변기를 동시점에 동일 공간에 3개를 만들어내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바를 모두 쫒아
티끌 안에 화장실을 수없이 만들어 두었다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게도 해주기도 하고,
또 화장실이 아니라 이제는 수많은 다른 귀금속이 필요하다면
귀금속도 그렇게 만들어 줘야 하고
그런 식으로 할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도 그 방안들은 앞에 말한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방안은
역시 어리석음에 바탕하여
진리의 내용을 뒤바꿔 잘못 이해하고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여 고착되고,
그런 가운데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 집착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물리적 문제를 해결해도
해결이 끝내 안되는 상태로 남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예를 들어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황금을 모두 원해 갈증을 낸다고
이제 물처럼 공기처럼 누구나 원하는 만큼 풍부하게 사용할 만한 양의 황금을 제조해내서
각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해
즉, 갈증을 내어도 쉽게 얻어지지 않는 또 다른 것에 무언가에 대해 바꿔 갈증을 일으키게 될 뿐입니다.
결국 무엇이 문제의 원인인가 하면,
그렇게 집착하고 고집하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무언가 한정된 것을 자신만 독점해서 볼 일을 보고 시원해지기를 원한 상태에 모두 있다면,
그 이유 때문에 위 방법으로는 문제가 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재의 바탕에서는
이런 경우들이
전혀 실답지 않고 망상적인 내용을 놓고,
그 바탕에서 그런 식으로 집착과 고집을 갖고
그 집착과 고집으로 인한 문제로 고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다른 차원의 관계를 보지 못하면,
결국 풀리지 않는 문제에 얽매여 살게 됩니다.
풀려난다면 어디서 풀려나는가 하면,
원래 풀어져 있는 곳에서 풀어지게 됩니다.
////
사실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하면
이 문제가 어떻게 쉽게 풀리는가를 이해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앞과 같은 예에서 관계된 모든 사람을 다 최면을 걸어서
눈앞에 3개의 공 또는 세개의 화장실이 다 제각각 눈앞에 있다고 받아들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최면이 안 걸린 사람에게는 그렇게 최면에 걸려 행동하는 이 3인이
모두 어처구니 없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 3인에게는 그 상태에서는 해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재는 원래 그렇다 그렇지 않다 할 수 없고,
전 후를 세울 수 없기에 문제되지 않는데,
이것을 현상에서 제각각 망상으로 고집을 피우며 분별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므로,
그것을 최면을 통해 풀어준 위 상태도 사실 잘못이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결국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앞과 같은 현상 내 문제를 현상 차원 안에서 생각되는 한계를 넘어
인과관계에 올바로 맞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경전에서 모래수만큼 많은 세계를 건너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구절을 보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데,
이 경전구절은 앞과 같이 승의나 실재의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침에 부처님이 식사를 하셨다는 것처럼
세속에 관해 세속적인 의미로 이야기를 하신 가운데 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앞에 말한 의타기성 즉 연기관계에 의해
그렇게 해결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서, 어떻게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우주 공간을 한 없이 건너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가가 정말 문제된다면 이 문제는 인과관계에 의존하여 해결할 의타기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런 물리적 한계가 있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의 문제는
기존의 내용을 절대적 내용으로 고집하지 말고, 실재와 관련시킨 가운데 현상내 인과관계의 의존해서
원하는 상태를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상황이 놓인 한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빛이 결코 뚫고 나갈 수 없는 담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담을 사이에 둔 두 장소를 빛처럼 오직 직진해서만 나아가 도달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
직선을 계속 잇고 이어서 무한하게 멀게 이 두 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빛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이 두 지점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도저히 원하는 시간내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입장은 현상에서 얻는 내용을 절대적인 내용 기준으로 생각하는 상황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 같은 상황에 그런 빛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히 가로 놓여진 담을 넘어가거나, 담을 돌아 뛰어 도달하는 방편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대하는 현상은 실재가 아니며,
현상에서 원하는 내용은 그것이 나타날 인과관계를 이용해 얻으면 된다는 입장으로 접근하는 상황을
비유로 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
단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관념으로 상상으로 또는 말장난으로 그렇게 간 것으로 현실을 보자고 한다면,
이는 단지 관념으로만 해결을 하자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하는 현상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올바른 인과관계를 찾아 노력하면
앞과 같은 비유처럼 필요한 인과관계를 찾아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는 실재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모두가 부처라는 말도 하고
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3 아승기겁의 계속된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도 하는데
이 두 말은 각기 다른 차원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재의 차원에서는 부처나 일반 생명이나 모두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서로 간에 차별을 세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앞 말이라면,
뒷말은 현상의 차원에서 부처님이 갖춘 모든 품성과 능력을 모두 갖추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시간동안 생사를 반복하면서
인과관계에 따른 올바른 수행 정진을 통해 노력하면 성취를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서로 다른 차원의 다른 내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각 내용을 뒤바꿔 이해하면 그로써
불교 전반에 대해 뒤바꾸어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꿈은 현실로
현실은 실재로
모두 뒤바꿔서
이해하는 것과 같게 됩니다.
- 이상 -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2-06-토-02-15-31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ж[ 웹 ]ж [web] http://blog.paran.com/buddhism007/47430819
⇔[ 관련문서]⇔
{!-- 관련 문서 링크--}
Ш[ 관련 문서 인용 부분 ]Ш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올린글-게시판 > 근본불교_대승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이 뒤바뀐 것인가[전도의 의미] (0) | 2012.04.19 |
---|---|
대반야바라밀다경-초분-01연기품-01-공부 (0) | 2012.02.08 |
대반야바라밀다경-목차 (0) | 2012.02.08 |
인연관2- 불교는 과학인가 종교인가 (0) | 2012.01.30 |
● 인연관을 살피면서-1 (0) | 2012.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