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b value FR 415b-ide
○ 세상의 문제는 결국 좋음의 충돌 문제다.
눈을 떠 바라보면 좋은 것, 나쁜 것,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
좋은 것에는 탐욕을 갖고 집착하게 되는데, 탐욕이 무한하고 성취되지 않기에 불쾌가 일어난다.
나쁜 것에는 또 분노를 갖게 되는데, 분노가 풀리지 않기에 불쾌가 일어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서로의 반대면이어서 서로 반대의 관계도 갖는다.
즉, 좋은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불쾌와 분노가 일어나 화가 난다.
나쁜 것이 분노를 통해 해소되면, 만족이 얻어진다는 관계도 그런 반대관계다.
결국 이들은 모두 좋음의 문제다.
○ 그래서 이 좋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좋음과 나쁨이 서로 충돌하고,
이들은 시간적으로도 충돌하고,
각 주체마다 서로 충돌한다.
지금 좋음을 주는 것은 그로 인해 나중에 나쁨을 받기도 하고 [시간적]
내게 좋음을 주는 상태는 다른 이들에게 나쁨을 주기도 하고 [ 주체간 ]
그 반대도 성립하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형태가 다양하다.
그래서 지금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모든 주체에게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오래오래 좋음이 얻어질 수 있는가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사람이 노력하는 것도 결국 이 문제이고 다른 생명도 결국 이 좋음 때문에 분주하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에는
좋음을 주는 것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좋음을 여러 주체에게 많이 오래 오래 얻게 하는 방안이 무엇인가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모든 방면에 깔려 있다.
○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이 우선적으로 당면한 좋음에 이끌려 추구해나간다.
각 생명이 본능적으로 감성적으로 좋은 것을 추구하여 행동해나감을 의미한다.
반대로 싫음 나쁨을 피하려 하고 그것에 화를 내고 공격하는 것도 같다.
결국 그것은 다른 형태로 좋음과 관련한 문제다.
어떤 사람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고, 미생물부터 성인까지 모두 그것을 추구한다.
단지 성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생명에게 오랜 좋음을 주는 것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점에서
미물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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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각 주체가 본능적 감성적으로 좋음에 이끌려
탐욕을 추구하고, 분노를 일으키는데 그것을 일찍이 mun 님이 1 이라는 숫자로 표현했다.
온 세상의 생명들이 이 1을 기초로 살고, 그런 결과 자신의 나중의 또 다른 1, 또는 다른 이의 1들과 지금 나중에 걸쳐 충돌한다.
○ 그렇게 이 1을 기초로 살면서, 다른 1과 충돌하게 되면
이제 그것을 기초로 어느 주체는 2로 변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마시려는 물을 누군가 빼앗아 먹는다면,
물을 마시려 한 자신과,
그 물을 빼앗아 먹으려 한 상대는 모두 처음에는 각기 1의 입장에 있다.
그런데 뺏긴 그는 화를 내며 상대를 공격하고 해하려 하게 된다. 이 두번째 단계를 2로 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갖는 1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1과 1의 충돌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이 들이 서로 부딪혀 싸우기 때문에
제 3 자가 그 가운데 문제를 일으킨 이 당사자들 사이에 개입하여 이 둘 모두 또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벌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렇게 부딪히는 입장 들간에서 어느 한쪽이 그것을 중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한다.
○ 또 서로 팽팽한 둘이 부딪혀 충돌하기에, 이 둘 사이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모든 충돌문제에서 벗어나 떠나려는 입장이 나타난다.
그것을 mun님이 4 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세상은 복잡하고 시끄럽게 돌아간다.
● 만일 처음 1과 2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충돌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행동한다면, 원천적으로 충돌하지 않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원칙적으로 그와 같이 권유하게 되고 그렇게 권유하게 되는 1과 2와는 반대로 행하는 입장을 각기 5와 6으로 제시한다.
○ 그러나 처음 1과 2의 입장에 서 있던 이는 쉽게 그렇게 되지 못한다.
앞의 1과 2가 각각의 입장에서 가장 본능적으로 감성적으로 이끌려지는 것인데,
그것과 반대로 행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가 너무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고파 밥가지고 서로 다툼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각기 밥을 먹지 말고 참으라고 요구한다던지,
또는 자신의 밥을 훔쳐 먹어도 그저 참고 용서하라는 요구 등이
각자의 입장에서는 다 따르기 힘든 요구가 된다.
그래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 그러니 문제해결은 어렵고 세상은 이를 기초로 늘 복잡하고 시끄럽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앞에서 mun님이 멍에, 소 코뚜레의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생명은 그렇게 사실 소 코 뚜레에 꿰인 소처럼,
본능적으로 감성적으로 좋게 느껴지는 것과 나쁘게 느껴지는 것, 어리석음에 의해
이끌려 다니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코 뚜레에 코가 꿰여
이에 이끌려 다니고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비유할 수도 있다.
코 뚜레가 꿰인 소가 그 상태에서 그것을 끊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능적으로 감성적으로 좋음을 느끼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들에서
한 생명이나 사람이, 그것을 쉽게 거부하고 벗어나올 수 있을 것인가.
또 화가 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여기에서 쉽게 벗어나올 수 있을 것인가.
소가 소 코뚜레를 끊고 벗어나옴이 힘들다고 보듯,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힘들다.
● 7의 방안:
○ 그래서 사실 우선 이보다 좀 더 쉬운 것은
당장 좋음의 당사자가 아닌 상태에 놓여 있는 제 3자들부터
이 관계에서 벗어나오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결국 이들은 자신부터 기본적으로 그런 1, 2, 3, 4의 상태에서부터 벗어나고
남도 벗어나게 해야 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또 적어도 각 주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행하지 않도록
잘 이끌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간단히 보면 1과 2의 원리로 행하는 각 주체를 5와 6으로 이끌어야 한다.
더 나아가 과거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함께 개입하거나 방관하여 문제를 만드는데 기여한 3과 4 도
함께 변화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이 5와 6을 쉽게 행하면서
남의 1과 2의 충돌을 일으키는 이들과
더 나아가 3, 4의 방안을 취하는 이들까지
모두 그 상태에서 벗어나와 좋음을 누리게 이끌 수 있는 방안을 7 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 그 7 의 방안이란
우선, 처음 1과 2의 관계에서 그 둘이나 그 가운데 누군가를 벌하고 가해하는 방식으로
억제하고 눌러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7의 입장에서, 1과 2의 입장으로 서로 대립해 다투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5, 6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1, 2의 추구 ( 본능적 감성적 이끌림)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인해 줘야 할 필요도 있다.
배 고픈 이가 밥을 먹는 것, 젊은이가 이성을 사랑하는 것, [1]
또 반대의 상태에서 이와 대립해 불쾌해하고 분노하는 것 등등[2]이 모두 그렇다.
생명의 거의 대부분이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이끌리고 부딪히는 것을
오로지 금하고 억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모든 문제를 각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정을 먼저 감안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앞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게 하려면,
우선 상대와 같은 입장에 들어가 공감하는 가운데 같은 원리로 그 상황을 보고
그런 바탕에서 그 상대를 이끌어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보다 쉽게 상대를 그 1, 2의 상태에서 벗어나오게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론 상대와 공감하면서, 그러나 상대와 똑같이 그 1,2 상태에 머물지는 않고
상대를 5,6의 상태로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 주체가 각기 집착하는 각각의 1은 그에게 본능적으로 감성적으로 가장 좋음을 많이 주는 절실한 요구다.
따라서 그것을 오직 금하기만 하고, 그것을 비난하기만 해서는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난다.
따라서 1과 2 각각의 요구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절대적 목표는 아니다.
그것이 배제되고 억제되어야 할 이유는 오직 그것이 '모든 생명에게 오랜' 좋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본능적 감성적 좋음을 주지만,,그 필연적 결과와 부작용으로 ' 나쁨'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좋음과 나쁨이 서로 충돌하고 섞여 있기 때문에 금하고 억제시킨 것이지,
본래 그 자체가 나쁨의 실체라고 보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좋음 나쁨이 섞여 있는데, 나쁜 면을 없애기 위해서 그것을 금한 것이므로,
일단 그 안에 담긴 좋은 부분은 긍정하고 시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런 상태에서 충돌하는 1, 2, 3, 4 들을 모두 5,6,7 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 5,6,7이란 방안도 결국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사실은 처음 1,과 2와 추구하는 방향 자체는 다르지 않다.
단지 그것은 당장의 좋음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오랜' 좋음을 주는 방향을 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처음 본능적 감성적으로 택하는 1, 2와는 달리,
각 주체에게 더 많고 더 오랜 좋음을 주는 것만이 다르다.
단지 1, 2 의 상태에서는 그 5, 6 이 우선 당장 본능적 감성적으로 좋음을 주지 않고
또 거리가 멀기에 쉽게 이해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당장 본능적 감성적 요구에 집착해 이끌려 가는 이에게
그들이 각기 집착하는 것들을 한편으로 시인해 주며,
그 바탕에서 그것도 주고 다시 그 외에 더 많고 오랜 좋음을 줄 방안을 깨닫게 해서
그들을 5, 6 의 상태로 이끌어 들여야 한다.
○ 1과 2의 사이에 개입하는 이들이 그렇게 상대를 이끌어 들이지 못하면,
그들은 결국 3과 4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즉 비난하면서 벌하거나, 모른체 방관하거나 할 도리 밖에는 없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스스로도 이 1과 2의 충돌을 모두 좋게 해결할 방안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래서 이끌어들이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 결국 7의 단계가 되려면,
그렇게 자신과 다른 모든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과 상태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7이 이런 목적으로
모두를 5, 6, 7 이상의 상태로 이끌어 좋은 상태가 되게 하려면,
다시 8 과 9의 새로운 방안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우선 1과 2의 충돌관계에서
단지, 3의 방안이나, 4의 방안 또는 5, 6, 7 방안만으로 해결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이 복잡한 단계들은 모두 좋음 때문에 일어난다.
사실 이런 좋음의 문제에서 가장 직선적이고 쉽게,
사람들이 대부분 취하는 본능적인 1과 2의 방안으로 해결될 수 없는가가
기본적 의문일 수 있다.
즉, 배고픈데 왜 저것을 당장 먹으면 안 되는가..
미운데 왜 당장 때리면 안 되는가. 등등의 의문이 그것이다.
그것은 당장 그것을 행해 나가면 곧바로 그 결과로 만나게 되는 일들이 좋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독과 부작용이 나타나는 좋음이고
얻은 좋음보다 더 많은 나쁨을 얻게 되는 좋음이고,
그래서 비유하면 독이 들어 있는 음식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작용, 나쁨, 독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좋음만을 자신과 남이 함께 오래 오래 많이 얻게 하는,
더 나은 방안 또 더 나은 방안 또또 더 나은 방안들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부작용과 나쁨과 독을 전혀 없게 하려면
사실 이 이상의 단계가 무한히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관상 당사자간에서 취할 수 있는 방안이란
당장의 욕심의 추구 실현 ~ 또는 포기 무시 외면 등에서의 선택이다.
따라서, 1과 2, 아니면 5와 6 의 모습이 된다.
그런데 이런 외관을 취하게 된 그 목적과 수단의 실질적 의미까지 검토하면,
앞의 단계와는 또 다른 8과 9들의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처럼 단계를 벌여세우고,
이런 방안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
이 문제를 처음의 문제
즉, 배가 고픈데 어떻게 안 먹고 참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참는다면
그렇게 참는 이는 여러 이유로 참게 된다.
이타적인 이유,
계율, 사랑,,,
등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조금씩 한계를 갖게 된다.
현실적 한계는
빵이 하나 밖에 없는데 사람은 많아서,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거나,
또는 자신은 사랑하는데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등이, 한계를 만들게 된다.
○ 그래서 결국 이런 모든 한계를 초극해 벗어나오려면,
결국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깨달아야 함을 보게 된다.
만일 빵과 배고픔이 문제될 때
누군가 눈 앞에 보이는 빵이나, 배고픔을 느끼는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런 가운데 빵이나, 삶에 대한 욕구,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빵과 삶에 집착을 갖고
그런 목표에 집착해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면,
이 문제의 한계는 너무 빨리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대상의 정체의 내용과 그에 대한 집착이 옳다면,
사실 앞에 나열한 그런 방안 외에,
별다른 해결방안이 없음을 의미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한계에서는
그 한계 안에서의 양보와 절제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베풀고 남을 살리지만, 우선 나부터 살고 난 다음에 남에게 베풀고 살린다는 식이 된다.
그래서 한계가 있게 된다.
○ 문제 해결의 수단에서도 같다.
살아갈 수 있는 방안과 배부를 수 있는 방안에서
지금 부딪히는 그 방안 밖에 없다면 그것이 한계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역시 앞과 같은 어려움에 쉽게 부딛히고 만다.
현실에서 다투고 대립하는 1과 2는 어떠한가.
대부분 서로가 더 물러날 수 없다고 절박하게 느끼고 그 상태에서 대립하는 것이다.
그처럼 다른 탈출구가 없다고 서로 느끼면서 대립한다.
모든 대립의 현장이 그와 같다.
● 그런데 진실은 어떠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진실에는 그런 한계는 없다.
그러니 문제가 풀려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앞의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한계를 만들어 내는 여러 상황에 대해
그 근본적 진리의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현상은 본래 영원하지 않다.
영원불변한 본체는 없다.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실재내용들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이런 것이 기본적 진리다.
그리고 이들 기본진리를 바탕으로,
우선 당장 자신이 집착해 매달리고 있고
그래서 그 한계를 벗어날 수도 대상들로부터 집착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을 벗어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집착하는 그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은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면,
앞과 같은 묶임에서 풀려난 상태에서
다시 그 문제를 모두 원만하게 해결할 방안을 도출해내고 실현할 지혜를 얻게 된다.
예를 들어, 빵은 1개이고 사람은 수만이다.
누군가 1사람만 살고 나머지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 상황에서 예상되는 내용과 달리,
사는 사람이나 죽는 사람이나, 모두 다 행복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또는 심지어 모두 다 살고 행복해질 방안이 있다면,
앞에서는 실현 불가능했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 앞에서 길게 말한 1, 2, 3, 4는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을 극복해 벗어나오지 못하면,
좋음과 나쁨이 뒤 섞인 상태에서
나쁨의 독을 시시 때때 맛보면서도
그 한계들로 인해 그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살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러나 진리는 그것만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고, 어렵고,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그것을 벗어날 이치와 원리와 방안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사실 5, 6의 방안만 실천해 보려해도 현실적 한계를 쉽게 만나게 된다.
당장 참기 힘든 불쾌와 고통을 참기 힘들다.
좋고 나쁨에서 느끼는 집착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지금 자신이 자신으로 보이고, 또 꽃이 꽃으로 보이는 분별 인식을 벗어나기도 힘들다.
삶과 죽음을 초극하여 벗어나기도 힘들다.
그래서 한계에 묶이고 만다.
이렇게 되면 벗어나올 길이 사실 막힌다.
그리고 현실의 대부분의 생명은 그렇게 1, 2의 관계에서만 주로 머무른다.
그리고 그 대립으로 인해
그 결과에서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자가 승리하고 강한자로 보이고
그래서 쉽게 약육강식의 원리만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허상에서 허상의 내용을 기준으로 취해 관찰할 때 얻는 피상적 내용이다.
마치 대변위에서 대장균이 대변을 모두 차지한 것을 놓고
대장균이 대변의 승리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장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그 허상의 바탕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여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 뿐이다.
○ 그러나 현상 실재 실체에 관련한 진리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현실은 꿈과 환상과 같은 것일 뿐 참된 실재가 아니며,
참된 진리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올바른 진리에 바탕을 두고
모든 것을 관찰하고 대하기 시작하면,
앞의 한계가 돌파되기 시작한다.
>>>
● 이미 글이 길기에 끝을 맺는다면,
모두 궁극적으로 오래 오래 좋은 상태에 머물고 남도 이끌려면
앞 1,2 단계에서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과 남 모두 5,6 이상의 단계로 이끌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게 하는 한계들을
돌파해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계를 돌파하는 단계에서
앞과 같은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리고 7 의 단계에 서서
이전과는 다른 선한 목적과
그 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선하고 지혜로운 방편과 수단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관은 같지만,
그 목적과 의미가 선한 또 다른 8과 9의 방안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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