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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4/02/05/수/18:37


[pt] ●논의과정에서 언어의 다양한 차원의 문제 

오늘 페이지를 마감하면서, 
한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복잡한 논의를 할 때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의 정체를 먼저 
자신에게서부터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일찍이 논의했던 
정신의 위치에 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선 자신이 문제삼는 
자신과 자신의 정신, 또는 대상의 문제가 
도대체 어떤 차원의 어떤 문제인지부터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의 문제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한편 대부분의 논의는 언어의 도움을 받고 전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언어가 갖는 성질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위를 놓고 이야기를 하면 쉽습니다. 

우리는 Bawi[바위] 라고 소리내고 또 '바위'라고 적습니다. 
이것이 소리낼 때는 소리이고 또 글자를 적을 때는 색깔입니다. [-언어감각내용-]
그리고 이 소리와 이 색깔로부터 
우리는 그에 상응한 관념을 얻어 갖게 됩니다. [-언어관념내용-]
예를 들어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머리 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바위라는 소리나 바위라는 글자가 있다면, 
그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일정한 관념이나 감각내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 자체는 감각내용이고 관념내용이지만, 
이렇게 다른 관념이나 감각내용을 가리킨다는 데에서 
언어가 됩니다. 

우리는 눈을 떠 바위를 본다고 할 때 
그 바위의 모습이 있습니다. 
또 손으로 만지면 만져지는 바위의 촉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각 감각기관마다 이렇게 종류를 나열하면 
대략 5 가지의 감각내용이 나열됩니다. [색깔-소리-향-맛-촉감] [ 바위의 감각내용 ]

그런데 이것은 감각기관이 상대하여 얻어낸 
정신 안의 내용물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감각기관을 상대하거나 하지 않거나,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생각으로 떠올리게 되는 
바위의 이미지, 관념이 또 있게 됩니다. [ 바위의 관념내용 ]

예를 들어  눈을 감고 바위를 보지 않는데도 
생각만으로 떠올리는 바위에 대한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우리가 현실 현상에서 얻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가 얻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감각기관이나 인식기관이 
관계하여 얻어낸 바위와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관계하지 않아도 
바위는 바위대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내가 눈을 떠 바위를 바라보았다면, 
내가 눈을 감아서 그 바위의 모습을 보지 못하더라도 
바위는 바위대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있지 않을까. 

또 그렇게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런 추리나 추측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과 관계하지 않은 
바위의 실재 내용입니다. [바위의 실재내용-  진여(眞如) ]


또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같이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자신과 관련되지 않고도 
그대로 있다고 할 어떤 실재내용을 추리하여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 사정이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현실에서 
바위를 볼 때 
그것이 볼 때마다 상황마다 또 각 주체의 감각기관마다 
각기 다른 내용으로 변화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침 햇빛에 바라보던 바위의 모습과 
한 낮에 바라보던 바위의 모습이 다르고 
저녁에 어두울 때 보던 바위의 모습이 다르고 
또 가깝게 다가가 볼 때와 
멀리서 볼 때가 다르고 
안경을 쓰고 볼 때와 벗고 볼 때가 다릅니다. 

또 눈으로 대할 때가 다르고 
귀나 손 등으로 대할 때가 다 다릅니다. 

그렇게 다르고 한 번 얻은 내용은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에 이들의 내용은 모두 마치 꿈이나 환영처럼 
진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현상적 내용을 떠나서 
다른 진짜의 내용을 찾게 됩니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진짜의 내용을 찾는 이유는 
현실에서 얻는 현상적 내용이 
한결같이 조건에 따라 변화하고 또 얻어졌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데에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반대되는 진짜는 
이런 성질을 갖지 않는 것을 관념으로 설정하고 찾게 됩니다. 

즉 조건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 불변하며 고정되어 있는 어떤 내용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것을 실체나 본체라 이름짓고 찾게 됩니다. [ 바위의 실체 ]

그것은 바위의 실체를 얻어서 그런 것을 찾는다기 보다는 
현실의 내용이 그런 것이어서 진짜라고 
볼 수 없기에 그에 반대하는 내용을 관념으로 설정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을 가지고 
실체를 찾게 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각 조건 따라 다 다르고 
또 매번 변화함을 경험하지만, 
그러나 오늘 보고 내일 보고 또 다음 날 보면 
어느 정도 골격을 갖추고 그 범위에서 
변화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현상의 다양한 내용에는 
각기 그렇게 현상의 내용을 우리가 얻어 가지게 하는 
일정한 뼈대로서 영원불변한 본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추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추리 끝에 
자신이 현실 현상에서 얻어 놓은 
여러 감각내용과 관념내용들을 기초로 
이 현상을 일으키게 한 영원불변한 본체를 
상상하고 구상하여 찾아 나서게 되고 
또 주장하게 되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이런 내용을 모두 다 
가리키고 표현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언어에 담겨 있는 이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언어에만 의존해서 논의에 참여하면 
엉뚱한 논의로 빠져 들어가게 될 위험이 커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바위에 대해서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여 
바위는 2음절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이는 바위의 실재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바위의 실재는 얻어낼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엉뚱한 극단적인 예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그런 논의의 혼잡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학자가 쓴 글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그 단어로 그 학자가 그 단어와 관련되는 여러 차원의 내용 가운데 
어떤 차원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그 단어만 가지고는 파악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일일히 바위라는 단어에 대해 바위가 가리킬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차원의 내용을 구분하고 사용할 수 없고 
또 그렇게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장의 전후 사정을 살펴서 
상대가 어떤 차원으로 단어를 사용하는가를 살펴야 하는데 
문제는 학자에 따라서는 그 자신도 
그렇게 혼동한 가운데 여러 내용을 다 섞어서 
다 함께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 
지적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즉 크게 보아 실재[원성실상]와 감각내용[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내용[변계소집상]은 
서로 일정한 관련은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별개인 것이고 

이들에는 각기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고[승의무자성]
감각내용은 인연조건 화합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니고 [생무자성]
관념내용은 감각내용과 같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님[상무자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이가 관념을 갖고 말로 이것을 표현하게 되면, 
이 관념의 내용이 
감각 현실에도 그대로 있고 
더 나아가 실재의 내용도 그와 같다고 고집하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은 영원불변한 고정된 어떤 본체도 
그와 같이 갖는다고 고집하여 
이 모든 내용을 관통시켜 이해하는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중론송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이 각각을 분리시켜서 
논의에 들어가야 
이 각각을 서로 뒤섞어 혼동하는 가운데 
논의를 진행하여 일으키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위가 두 글자로 되어 있다고 
자신이 감각한 바위의 모습이 두 글자는 아닙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눈을 떠 바위를 보았다고 하여 
눈을 감고 떠올리는 바위의 관념도 그와 같은 내용은 아닙니다. 
또 현실에서 이처럼 감각도 하고 관념도 가졌다고 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얻게 해준 바위의 실재 내용도 
그와 같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현실 주체는 일정한 조건에서 현실내용을 얻는 것이어서 
이 조건을 벗어나면 
어떤 주체도 어떤 내용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재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는 
그런 사정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런 실재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불가득] 
있다라고도 할 수 없고 없다라고도 할 수 없다.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
좋다 나쁘다. 등등의 모든 이분법적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불이不二]
라고 표현하고 
그런 상태를 언어로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 의미가 비어 있는 공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 공이란 표현은 앞과 같은 상태의 실재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가리키기 위한 수단이고, 
그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기능을 할 뿐 
손가락이 달은 아닌 것과 사정이 같습니다. 

여하튼 언어를 의존하여 논의를 진행할 때는 
하나의 언어는 이처럼 여러 차원의 내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논의가 지금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는가를 
음미한 가운데 논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중론송 같은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일으키는 오류도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즉 각 단어가 의미하는 의미를 
자신이 이해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이해하면 
이 내용들이 모두 궤변과 같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중론송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실재내용이나 
실체의 존부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 논의임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의미를 얻고 
그것이 옳다거나 틀리다거나 논의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출발하는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이들 논의는 논의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지만, 
종국적으로 그 논의를 통해 

세계는 어떠하고 
자신이나 자신의 정신의 정체는 무엇이고 
또 자신은 그런 바탕에서 
어떤 상태의 실현을 위해 
어떤 방안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판단하는 데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갖는 악이나 불행, 고통이 
문제인데 이것의 제거를 위해서 
이런 여러 판단들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야 이렇게 이해하던 저렇게 이해하던 
그것이 원래 있는 대로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자신이 어떤 상태를 어떤 방편을 찾아 
실현시켜나갈 것인가가 이런 여러 기본적인 판단과 
관련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악이나 불행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현실에서 갖는 
여러 잘못된 분별, 망상과 그에 바탕한 
집착이 그 원인이 됨을 제시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무엇인가를 놓고 
그것이 바위라고 보고 
그 다음 그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고 
그 다음에 각기 탐욕과 분노의 집착을 갖고 
대해 나가기 때문에 
현실에서 모든 악과 불행, 고통의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대로 말하면 
이런 잘못된 분별, 망상을 지우는 작업이 
가장 선행되어야 합니다. 

little님이 지적하는 문제는 이와 관련됩니다. 
현실에서 잘못된 관념으로 잘못된 분별을 행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고집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우기 위하여 

앞과 같은 여러 판단을 올바로 행하고 
집착을 떠날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각기관이나 인식기관에 독을 발라서 
지워야 한다고 하는 분은 없습니다. 

무조건 지우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간혹 있어서 
워낙 답답해서 그런 억지 주장을 해보는 것으로 압니다. 




결국 잘못된 분별 망상을 지우고 
집착을 벗어난 가운데 

실재를 바탕으로 고통이 사라진 상태를 확보하고 
다시 감각현실 그 자체도 본래 고통이 없는 상태임을 확보하고 
이제 관념 영역에서 올바른 관념과 판단을 통해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한 목표를 
즐겁고 행복하게 잘 추구해 실현해나가는 것이 
목적이 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올바른 판단과 수행은 필수적이라고 보게 됩니다. 

독약을 감각기관이나 인식기관에 발라서 
감각기능과 인식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복하여 제시한 감이 있지만, 
그렇게 해서 
변계소집상의 내용이 변화하면 
그로 인해서 의타기상이 변화하고 
그로 인해서 이후의 내용이 또 
악과 불행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되게 되는데 
이것이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존재를 논의할 때 
또는 언어가 가리키는 여러 차원을 가리킬 때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 내용이 모두 
청정하고 악과 고통이 소멸된 상태
그리고 대신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한 행복과 
지혜만이 가득 채워져 
무시 무종의 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봅니다. 

독약을 처방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극히 일부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려 선정은 그런 독약을 바르는 수행이 아닙니다. 

정신의 착오나 
분별 망상과 그에 바탕해 만들어진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방안이기도 합니다. 
역시 기본적으로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논의과정에서 언어의 다양한 차원의 문제 
○ 언어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value

◑[작성일]◐ 2014-02-05-수-20-30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 언어 o:/G/G/10/휴게소잡담공간/2014-02/2014-02월_댓글보전.txt ♠●논의과정에서 언어의 다양한 차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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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 http://extra007.tistory.com/553 ♠●논의과정에서 언어의 다양한 차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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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 Tokyun 2014/02/04/화/19:11


♥ 잡담 ♥서양 사상의 논의 방향에 대하여 

서양 철학 사상을 대강 훑어볼 예정이다. 
그리고 관련된 내용을 논의하고자 한다. 

문제는 살펴보는 개설서가 번역된 개설서라는 점일 것이다. 
이는 늘 원전과의 일치성여부가 문제된다. 

예를 들어 오늘 살펴본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훗설은 이렇게 주장했다. 

즉 자연과학의 태도로부터는 

정신적인 것의 설명을 위한 순수한 독립적 탐구가 불가능하며, 

심리적-자기-경험 내의 자아에서 출발하여 다른 심리에로 확장되는 

내면 지향적 심리학이나 정신 이론이 전혀 불가능하다. 

...

여기에 대해서 논의할 때는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이 문제된다. 

이 한글 번역본에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에서 
낯선 개념이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심리적-자기-경험 내의 자아'와 같은 부분이다. 

여기에 대해 상식적인 의미로 자신이 이해하는 뜻이 
과연 처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훗설이 뜻하는 의미와 같은가 등이 문제될 수 있다. 
또 이 문장 전체에 대해서도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과연 훗설이 어디에서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사실인가. 
이런 것이 논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우선 이 글과 함께 
이 번역본이 의존한 원본 개설서 내용을 찾아 확인해야 함과 함께 
다시 원래 이런 내용을 이야기했다는 훗설과 훗설의 저작물을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해당 자료를 찾어 참조해나가는 작업과 함께 
다시 각기 언어의 장벽이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훗설과 같은 경우에는 
1차적으로는 한글 번역본  
2차적으로는 한글 번역본이 저본으로 한 영어 등의 외국어본 
3차적으로는 원래 원본이라고 할 독어 등의 외국어 원 자료 
등이 있게 된다. 

영어나 독어까지는 그렇다 치고 
철학사의 연구에서는 이것이 광범위하게 확대된다.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는 그리스어가 문제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시대도 각기 달라 
어떤 경우는 고대 2000 여년전의 그리스어가 문제될 수 있다. 

철학 사상을 대강 훑어보는 것이 목적인 입장에서는 
이런 작업이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취하기로 하였다. 

만일 개설서등을 보다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자 할 때는 
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원전과 분리하여 
논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만일 위에 인용한 부분에 대해 논의를 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

훗설은 이렇게 주장했다. 

즉 자연과학의 태도로부터는 

정신적인 것의 설명을 위한 순수한 독립적 탐구가 불가능하며, 

심리적-자기-경험 내의 자아에서 출발하여 다른 심리에로 확장되는 

내면 지향적 심리학이나 정신 이론이 전혀 불가능하다. 

...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논의를 시작한다면, 
비록 이 내용이 위 책에서 훗설의 주장 내용이라고 제시받고 
논의하게 된것은 사실이지만, 

본 논의는 여기에서 위 내용을 독립적으로 
새로운 주제로 보고 논의하겠다는 의미다. 

즉, 이 부분에서 '훗설은 이렇게 주장했다.' 라고 하고 
내용을 제시하는 데, 
만일 이것이 훗설의 주장이 아니라거나 
또는 이 부분이 잘못된 번역에 기초한 이해라는 등의 문제제기가 될 때에도 
그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논의는 오직 위에 제시된 실질 내용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그것은 만일 어떤 이에게서 이런 주장이 제시된다면,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는 입장과 같다. 

그 어떤 이가 물론 여기에서는 훗설이라고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논의는 오직 훗설이 주장했다고 제시된 
그런 실질 내용을 놓고 새로운 논의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정말 훗설이 했는가 등의 논의는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만일 이를 논의하고자 하면 앞에서와 같은 여러 논의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서양 철학을 살펴보려는 작업에 지장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런 논의 부분은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는 것이다. 

때로는 위와 같이 내용을 완전히 옮기지 않고 
내용을 풀어서 제시하고 논의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더더욱 이 논의는 별도의 독립된 논의가 된다. 

물론 만일 그 내용이 훗설의 주장에 의해 시사받은 것이라면 
그런 내역을 밝히고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이는 주장되어진 실질 내용에 대한 논의이며, 
그것을 정말 훗설이 주장했는가 등의 논의로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기재되어 있다. 
http://story007.tistory.com/930 ♠♥ 잡담 ♥원전과 관련된 주제의 논의 방식에 대하여









문서정보

http://extra007.tistory.com/553 ♠♥ 잡담 ♥서양 사상의 논의 방향에 대하여 

[pt] to http://story007.tistory.com/930 ♠♥ 잡담 ♥서양 사상의 논의 방향에 대하여


참조자료 



댓글 테이블 


◈Mun Tokyun 2014/02/05/수/08:57


 ♥ 잡담 ♥연구 방향의 재 검토 
 
little 님과 lab 님이 남긴 글을 보니 
연구 방향에 대해 재수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여러가지 논의를 살펴보려 한 것은 
최근에 little님과 doctr 님이 연구 과정에 도입한 구체적 사례 연구 방안에 
시사받은 바가 큽니다. 

그리고 
구체적 사례를 통해 연구하는 것이 
연구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구체적 사례를 
여러 사상가들의 논의에서 찾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역시 lab님이 지적한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La Fouine, Fababy, Sindy & Sultan - Team Bs




그래서 결국 노래를 다시 들어 보게 됩니다. 
노래가 제가 해석한 대로도 들리지만, 
또 다시 들어 보니 
lab 님이 해석한 대로도 들립니다. 

원래 노래를 듣다가 
노래 가사 뜻이 무언가 하고 
원래 가사와 
영어 번역본도 참조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이 노래 소리들이 한국 발음으로 들리는 대로 
무슨 뜻인가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런 끝에 각기 제 각각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이 사실은 

원전과 관련된 논의를 진행하는 상황과도 
관련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생각해보건대 
노래 자체는 시와 같아서 
거기에서 꺼내 올 수 있는 의미가 수없이 많겠지만, 
이 노래에서 
현재의 연구과정에 시사하는 점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수기 같은 것을 하지 말고 
화내는 것 같은 것을 하지 말라. 
그런 경우 lab님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바로 얽힌 것이고 
또 설령 이긴다 해도 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lab님의 이야기를 보고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옛날에 예수란 분이 재판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고 
또 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또 재판장은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여하튼 세상은 복잡합니다. 




비슷한 사례들을 과학사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천동설이 정설이었다가 
어찌어찌하여 지동설이 정설이 되었는데 
오늘날은 천동설도 맞고 지동설도 맞다는 것이 
결론이 된 듯 합니다. 

태양이 도는가 지구가 도는가. 이런 것이 
주제가 되었는데 
사실은 둘 다 바삐 돌아 다닌다. 

이런 것이 오늘날 주류의 입장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돌 때도 있고 
또 가만히 있을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고 하네요. 
지구도 돌 때가 있고 조금 멈출 때도 있고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 빨리 달릴 때도 있고 
조금 천천히 달릴 때도 있고 
사이 사이 잠깐 멈출 때도 있고 
그렇다고 합니다. 

사실 그것이 이치라고 봅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는 
늘 같은 속도로 같은 공간을 
같은 주기로 같은 궤도로 
돌아다닌다. 

이렇게 믿고 사는 것이 
마음의 안정을 주기도 합니다. 

사례 연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고 
시비에 얽혀 들지 말고 
논의 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 잘 연구해 이해하고 
이해를 마친 다음에는 잘 정리해 보고하고 
시비에는 얽히지 말고 벗어 나오라. 

이것이 lab님의 권고 사항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제 연구 방향을 또 한번 
변화시켜 보려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나 훗설의 논의에서 
시사를 받아 연구를 진행한다고 할 때 
이들의 이름이나 논의 내용을 거론하지 않고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또 얼마나 시비를 벗어나 논의를 해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은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례를 다 외면하고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올바른 방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이런 바탕에서도 
부처님의 경우나 예수님의 경우도 
무언가 올바른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면 
논의는 하더라도 시비에 얽혀 들지 않을 
방도를 찾아 논의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시비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기는 어렵지만, 
찾기는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lab님이 사상가들의 사상의 시비에 얽히지 말라면서 
전(纏-얽어묶을 전)이라는 글자를 하나 소개해주는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lab님이 이들 사상가들의 시비에 얽혀 들지 말라며, 

이들 사상가들의 책을 직접 보고 이에 영향받아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이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수보다 적으니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들을 통해 언뜻
시대를 거쳐 나타난 여러 사상가들이 
마치 신도수가 적은 사이비 종교 교주나 되는 것처럼 
뉘앙스를 주며 제시한 것은 오히려 
시비에 얽혀들어가는 가장 큰 비난이 아닌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 여기에서 자유로우려면 
침묵하고 일절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또 그것이 올바른 방안이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여하튼 전(纏) 이란 글자는 번뇌에 대한 다른 명칭이라고 하는데 
이 사상가들의 논의가 
사실은 견해의 얽힘이고 다툼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다 바쳐 그 견해의 다툼에 얽혀 들게 하고 
그렇게 생을 마치게 합니다. 

견해로 인해 일으키는 번뇌도 번뇌지만, 
이와 함께 일어나는 감성의 번뇌도 또 문제입니다. 

그래서 번뇌에 대한 항목을 찾아 보게 되는 데 
http://ko.wikipedia.org/wiki/%EB%B2%88%EB%87%8C
견해에 관한 번뇌의 종류도 
신견,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 등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가리키는 명칭도 많고 
그렇게 부르게 되는 사유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다 읽을 수는 없고 
우선 번뇌는 이치에 어둡고 현상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혹(惑)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부분까지만 참조합니다. 

여하튼 연구 방향을 사례로서 참조하되 
시비에 얽혀 묶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방편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 의 논의로부터 시시받아 논의하게 되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논의 

이렇게 해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소한 ~의 논의로부터 시사받아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고 
또 이런 내용은 밝혀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예 논의를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요. 

논의를 하기도 전에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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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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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문서창


훗설은 이렇게 주장했다.
즉 자연과학의 태도로부터는
정신적인 것의 설명을 위한 순수한 독립적 탐구가 불가능하며,
심리적-자기-경험 내의 자아에서 출발하여 다른 심리에로 확장되는
내면 지향적 심리학이나 정신 이론이 전혀 불가능하다.

Samuel Enoch Stumpf, ##A History of Philosophy## (2nd ed; : McGraw-Hill inc, 1975) 이광래 역, 서양철학사 (서울: 종로서적, 1983), p.628




Ω♠문서정보♠Ω

™[작성자]™ Mun Tokyun
◑[작성일]◐ 2014-02-04-화-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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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 ]▩ J:/extra/ld_002_철학/서양철학사/Wph_사무엘스텀프_06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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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파일 J:\extra\ld_002_철학\서양철학사\Wph_사무엘스텀프_0628.tif
Samuel Enoch Stumpf, ##A History of Philosophy## (2nd ed; : McGraw-Hill inc, 1975) 이광래 역, 서양철학사 (서울: 종로서적, 1983),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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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상의 목록 ●철학 o:\G\G\07\712-PHIL\Phil-catalo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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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공부_0001



참고도서 
Samuel Enoch Stumpf, ##A History of Philosophy## (2nd ed; : McGraw-Hill inc, 1975) 이광래 역, 서양철학사 (서울: 종로서적, 1983), p.623 
Hans Joachim Störig, ##Kleine 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 (Berlin, Verlag W. Kohlhammer, 1970) 임석진 역, 세계철학사(하) (칠곡군: 분도출판사, 1976), p.383















참고 문헌 디스크내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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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n Tokyun

◑[작성일]◐ 2014-02-04-화-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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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 ]▩ j:/extra/ld_002_철학/서양철학사/Wph_사무엘스텀프_0623.htm

원본파일 j:/extra/ld_002_철학/서양철학사/Wph_사무엘스텀프_0623.tif

Samuel Enoch Stumpf, ##A History of Philosophy## (2nd ed; : McGraw-Hill inc, 1975) 이광래 역, 서양철학사 (서울: 종로서적, 1983), p.623 



▩[ 디스크 ]▩ J:/extra/ld_002_철학/세계철학사_하/phh2_슈퇴릭히_0383.htm

원본파일 J:/extra/ld_002_철학/세계철학사_하/phh2_슈퇴릭히_0383.tif

Hans Joachim Störig, ##Kleine 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 (Berlin, Verlag W. Kohlhammer, 1970) 임석진 역, 세계철학사(하) (칠곡군: 분도출판사, 1976),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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